신문 배달

젊은 날의 가슴 아픈 추억들

by자봉

구순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오토바이를 몰며 신문을 배달하는 어느 퇴역 육군 대령의 이야기를 텔레비전을 통해 접했다.


연대장까지 지낸 노병이 몸을 움직이기 위해 매일 길을 나선다는 소식은 깊은 존경심을 자아내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50년 전의 빛바랜 기억을 송곳처럼 찔러왔다.

오토바이로 신문을 싣고 달리며 자동이체로 구독료를 받는 오늘날의 풍경을 보며, 문득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후반의 애달픈 저녁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신문 배달은 낭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삶의 무게였고, 열일곱 살 소년이 마주하기에는 너무나도 가슴 아팠던 세상의 민낯이었다.


1. 무등산 자락, 눈비 내리던 저녁

당시 나는 방과 후면 지방 일간지를 어깨에 풀떡 메고 시내버스에 올랐다. 매일같이 만원 버스 틈바구니에서 신문 뭉치를 소중히 끼고 내달리던 길. 나의 배달 구역은 무등산 증심사 초입에 있던 어느 양계장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도, 발이 푹푹 빠지는 폭설이 내리는 오후에도 거를 수 없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신문 한 장을 넌지시 건네며 겨우 버스를 얻어 타고 가, 양계장 문 앞까지 헐떡이며 뛰어가던 기억이 선하다.

손끝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던 그 길에서, 소년의 어깨를 누른 것은 신문 수십 부의 무게가 아니라 '오늘도 무사히 마쳐야 한다'는 무거운 바카라임감이었다.

한 번은 신문을 모두 돌리고 인근 야산 근처의 주택가를 지나던 길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험상궂은 청년과 맞닥뜨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가 짧고 꾀죄죄한 것이, 군대에 가지 않고 보충역으로 근무하던 방위병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유 없는 폭력과 위협 앞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냅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던 그날 초저녁의 공포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편에 기분 나쁜 얼룩으로 남아있다.



2.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던 토요일과 일요일의 설움


그 시절 고등학생 배달원에게 가장 고역은 신문을 나르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면, 신문 배달 대신 영수증 뭉치를 들고 가가호호 구독자 집을 방문해 구독료를 받아내는 '수금'이 진짜 전쟁이었다.

"신문대 좀 주십시오."

문 앞에서 조아리며 몇 번을 말해도, 선뜻 지갑을 여는 이는 많지 않았다. 두 달, 세 달씩 구독료가 체납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돈이 없다고 문을 쾅 닫아버리는 이들부터, 다음에 오라며 짜증을 내는 이들까지.


어린 학생이 독촉 아닌 독촉을 하며 문전박대를 당할 때마다 마음에는 서러운 생채기가 돋았다.

그래도 가끔은 숨통이 트이는 날도 있었다. 신문을 돌리다 보면 보급소에서 가끔 여분의 신문(매수)이 생기곤 했는데, 소년들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보너스였다. 그 귀한 신문 몇 장을 품에 안고 동네 밀가루 빵집으로 향했다. 인심 좋은 주인아저씨는 글자가 빽빽한 종이 뭉치를 받고는, 갓 구워낸 따스한 빵 몇 개와 바꾸어주셨다. 팥이 들어간 고소한 밀빵을 입에 물고 우물거릴 때만큼은 눈 내리는 겨울 추위도, 비가 억수같이 내려 옷이 다 젖었는데도 구독료인 수금을 하기 위해 아픈 서러움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3. 소년의 땀방울을 짓밟은 어른들의 민낯


그러나 진짜 배 아픈 추억은 고등학교 시절의 막바지에 찾아왔다. 내가 일하던 신문 보급소 운영이

어려워 보급 소장이 바뀌면서 사건이 터졌다.


보급소 운영이 뜻대로 되지 않자 전임 소장이 슬그머니 자리를 넘겼는데, 문제는 내가 석 달 동안 배달해서 일한 임금이 통째로 밀렸다.


돈을 달라고 하면 차일피일 서로 거짓말을 치면서 미뤘다ㆍ


전임 소장은 후임자에게 받으라고 미루고, 후임 소장은 전임자 일이라며 나 몰라라 했다. 어른들의 무바카라임한 '핑퐁 게임' 속에서 어린 학생의 노동은 공중에 붕 떠버렸다.

억울한 마음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노동부에 직접 찾아가 진정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힘없는 고등학생의 목소리보다 서슬 퍼런 언론사의 권력이 더 컸던 탓일까, 담당 공무원은 신문사로 전화 한 통 해주고는 이리저리 눈치만 보며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다.


법도, 국가도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무력감은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4. 공중전화 부스에서의 절규와 배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산수동 근처에 있던 검찰청 청사 인근의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손을 덜덜 떨며 동전을 넣고, 신문사 편집국 번호를 돌렸다. 다행히 연결된 담당 차장이라는 사람은 내 사정을 듣더니 사뭇 대인배처럼 말했다.

"학생, 억울한 사정은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무조건 본사로 찾아오게."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구원의 동아줄 같았다.


그 어른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먼 길을 달려 본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배신이었다.

차장은 석 달 치 밀린 급료를 정산해 주기는커녕, 한 달 치도 채 되지 않는 푼돈 만원을 본인이 충장로에서 운영하던 그럴싸한 양식 그릴 음식점에서 내 손에 만원을 쥐여주며 "이거라도 받아 라", " 나머지는 보급소장들이 해결해 줄 것이다. 라며 달콤한 거짓말로 달래고 타이르며 나를 밖으로 내몰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명백한 착취였고, 순진한 학생을 기만한 어른들의 비열한 술수였다.


억울함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거대한 언론사 건물 앞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옛날 사람들의 심보가 고약하고 나빴던 시절이었다.



5. 50년의 세월을 건너온 아린 기억


구순의 퇴역 대령이 이륜차

오토바이로 신문을 배달한다는 기사를 읽으며, 나는 왜 그 옛날 산수동 공중전화 부스 속에서 울먹이던 열일곱 소년을 떠올렸을까.


5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흘러 내 나이도 어느덧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지만, 그때 빼앗긴 땀방울의 대가와 어른들에게 받았던 상처는 여전히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배 아프고 가슴 아픈 추억이다. 하지만 가난했고 거칠었던 그 시절, 눈비를 맞으며 무등산 자락 증심사 주변까지 걷고 뛰었던 그 강인한 다리와 억울함에 맞서 공중전화 수화기를 쥐었던 그 오기가 있었기에, 지난 40여 년의 온라인 게임생활과 거친 세상풍파를 단단하게 버텨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따스한 밀가루 빵 몇 개에 행복해하던 그 시절이

고통스러웠지만 순간순간 젊은 날의 고등학생 시절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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