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는 아침부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베란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가슴을 파고드는 날이었다.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주식 시장을 확인했지만, 모니터 화면 가득 물든 파란색 하락 기운은 가뜩이나 가라앉은 마음을 더 눅눅하게 만들었다.
비는 내리고, 주식은 떨어지고, 마음 한구석에는 이유 모를 쓸쓸함과 우울함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오거나 마음이 적적한 날이면 자연스레 거실 한쪽에 세워둔 골프백으로 시선이 향한다. 삼십여 년의 온라인 게임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현직에서 물러났을 때,
세상은 참 고요하면서도 한편으론 낯설었다.
현직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울려 대던 전화벨 소리도, 늘 곁에 북적거리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며 한 명씩, 두 명씩 멀어져 갔다.
자주 연락하고 가깝게 지내자며 손을 맞잡았던 지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도 저마다의 삶의 무게 때문인지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조금씩 거리가 생겼다.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 세상의 인연을 서둘러 정리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린 동무들의 소식이었다. 부고 장을 받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텅 빈 것처럼 허허로워지고, ‘참 세상 살아가는 재미가 없다’는 허무함이 밀려들곤 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그 쓸쓸함에 잡아먹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옛 성인들의 말씀이나 바카라 속의 구절을 필사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운동화를 질끈 동여매고 지척의 숲길을 걸으며 하루 1만 보의 발걸음으로 스스로를 다독여왔다.
그래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훨씬 더 살만하고 좋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인생이 아무리 쓸쓸하고 덧없다 한들,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하루하루만큼 소중하고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날, 마음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최고의 묘약은 바로 골프채를 잡는 것이다.
비가 와서 야외 필드로 나갈 수는 없지만, 우리네 세상이 참 좋아져서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초록빛 스크린 골프장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은 집안에만 웅크려 있을 게 아니라, 무조건 스크린 골프장으로 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울한 기분을 털어내고, 오늘만큼은 필드 위의 황제가 되어 보리라 다짐하며 골프백을 챙겼다.
스크린 골프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실내를 가득 채운 시원한 공기와 눈앞에 펼쳐지는 선명한 초록색 가상 필드가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눅눅했던 빗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오롯이 나와 하얀 골프공, 그리고 목표 지점만이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먼저 묵직하고 단단한 드라이버를 꺼내어 손에 쥔다. 가볍게 빈 스윙을 하며 어깨와 손목의 긴장을 푼 뒤, 티 위에 얌전히 올려진 공을 응시한다. 마음속에 맺혀 있던 서글픔, 주식창의 파란 불빛,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저 하얀 공 하나에 모두 실어 보낸다. 깊은 심호흡과 함께 테이크백을 지나 백스윙 탑에서 잠시 머문 뒤, 온 힘을 다해 다운스윙으로 이어지는 채를 휘두른다.
‘깡―!’
클럽 헤드의 중심에 공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청명하고 쾌활한 타구음이 방 안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 자체만으로도 가슴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십 년 묵은 체증 내려가듯 시원하게 뚫린다. 화면 속 공은 거침없이 뻗어 나가 초록색 페어웨이 한가운데에 사뿐히 안착한다. "굿샷!" 기계의 활기찬 환청이 마치 오랜 친구의 응원 소리처럼 반갑게 귓가를 스친다.
세컨드 샷을 지나 공이 그린 주변의 까다로운 벙커나 러프에 빠져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인생의 숱한 굴곡을 넘어온 연륜이 골프에서도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가방에서 샌드웨지를 꺼내 든다. 모래를 부드럽게 폭 떠내며 공을 탈출시켜야 하는 정교한 순간이다. 욕심을 버리고, 무릎을 살짝 굽힌 채 공의 뒷부분을 부드럽고 정확하게 쳐낸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홀컵 근처에 이쁘게 멈춰 선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이 손맛이야말로 인생의 수많은 고비를 넘겨온 이들만이 맛볼 수 있는 진정한 묘미다.
마지막은 역시 퍼터의 시간이다. 그린 위의 미세한 경사를 살피고 공의 궤적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골프는 결국 이 작은 구멍 안에 공을 집어넣는 정교한 예술이다. 버디면 어떻고, 홀인원이면 어떻고, 혹은 보기면 또 어떠랴. 퍼터로 툭 밀어 넣은 공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홀컵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의 그 쾌감은 세상 그 어떤 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라운딩이 거듭될수록 이마에는 기분 좋은 땀방울이 맺히고, 아침의 그 찌푸렸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오늘 나의 목표는 명확하다. 스크린 위에서 당당하게 80대 타수, 이른바 ‘팔십 타’를 쳐내는 것이다.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매 홀마다 정성을 다해 드라이버와 샌드와 퍼터를 휘두르다 보니, 스코어카드에는 내가 원하던 이쁜 숫자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기 시작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필드지만, 그 안에서 나는 대자연을 호령하는 청춘으로 돌아간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골프채를 들고 휘두르면 그만이고, 날이 좋으면 배낭을 메고 발길 닿는 대로 자연을 걸으면 그만이다. 옷차림이 무엇이든, 곁에 누가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다. 내 건강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내 두 팔로 골프채를 힘차게 휘두를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지인들이 떠나간 자리는 쓸쓸하지만, 남아있는 내 인생의 시간들을 더 밀도 있고 즐겁게 살아내는 것이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결국 혼자 걸어가는 길이라지만, 이렇게 나를 위로해 주는 멋진 취미가 있고, 아직도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있으니 인생은 하여튼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고향집의 아궁이에 장작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