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스크린골프와 둘레길
날씨가 푹푹 찌는 여름의 길목에 서면 마음부터 덜컥 무거워지곤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요즘 들어 부쩍 건강검진 결과표에 적힌 문장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췌장에 발견된 점액성 낭성 종양. 모양이 변하거나 더 커지지는 않을까, 혹여 몹쓸 병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처음으로 eagle을 치고)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마음이 그늘진 곳으로 가 닿는다.
마음 같아서는 예전처럼 다시 일터로 나가 바쁘게 몸을 움직여볼까 싶다가도, 은퇴한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선뜻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평생 다녔던 온라인 게임을 떠나고도 5, 6년을 더 근무하며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까지 치열하게 일했으니, 이제는 정말 쉬어도 될 법하건만 건강에 작은 적신호가 켜지니 마음의 의욕이 먼저 풀 죽어버린다.
게다가 요즘은 고향 집안일마저 매끄럽게 풀리지 않고 시끄러우니,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 같지 않아 가슴속에 답답한 스트레스가 첩첩이 쌓여만 간다.
은퇴 후 70대의 삶이란 그저 물 흐르듯 평온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은 숙제들을 불쑥불쑥 내민다. 집에서 가만히 쉬거나 도서관을 찾아 바카라을 뒤적이다가도, 문득 밀려드는 잡념과 스트레스에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구원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대단한 명약이 아니라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초록의 자연과 오랜 세월을 함께 늙어온 소중한 벗들이다.
어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홀로 배낭을 메고 서대문 안산 자락길을 찾았다.
숲 속 가득 푸르게 우거진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싱그러운 숨을 뿜어내며 나를 맞아주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바라보며, 혼자 숲길 벤치에 앉아 간단히 간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서 걷는 길은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온갖 성가신 생각들과 건강에 대한 불안감이 하나둘씩 나뭇잎 사이로 흩어져 날아가는 듯했다.
그렇게 온전히 숲의 품에 안겨 다섯 시간을 걷고 나니, 가슴 깊은 곳까지 맑은 공기가 차오르며 요동치던 마음이 한결 편안하고 차분해졌다.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이란 이렇듯 소리 없이 강하다. 마음을 비우고 돌아오는 길, 내일은 또 벗들을 만나 활력을 채울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오늘은 중학교 동창 친구가
문래동에서 운영하는 카지노골프장으로 향했다. 퇴직 1년 선배와 함께 오랜만에 스크린 골프채를 잡았다. 그 선배는 스크린과 필드를 넘나든 경력이 벌써 5년이나 되어, 늘 기복 없이 고르고 단단한 실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이다.
보기(Bogey) 하나 없이 언제나 70대 타수를 유지하는 선배의 스윙은 부드럽고 매서웠다.
반면 나는 작년부터 간간이 채를 잡으며 쉬엄쉬엄 즐겼으니,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선배가 안정적으로 파(Par)를 잡아가며 앞서갈 때, 나는 파와 보기, 때로는 더블 보기와 더블파를 오가며 바삐 그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골프의 진짜 묘미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을 꼭 닮았다는 데 있다.
엊그제는 기분 좋은 버디(Birdie) 두 개를 잡아 손맛을 보더니, 오늘은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들다는 이글(Eagle)을 기록하는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왔다.
(스크린골프와 라이딩)
홀인원 다음가는 이글을 성공시키며 초록색 화면 위로 마이너스 2점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함께 있던 선배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록 최종 성적은 90타에 머물렀지만, 그 한 방이 준 삶의 청량감은 타수의 숫자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만히 내 일상을 돌아본다. 비록 나이를 먹어가며 느끼는 건강에 대한 염려와 소소한 스트레스가 삶의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산을 걷고, 둘레길을 누비며, 당구대 앞에서 길을 찾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가른다.
그리고 오늘처럼 스크린 골프장 푸른 화면 앞에서 활짝 웃는다.
인생 후반기라 할 수 있는 70대의 시간들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역동적이고 즐겁게 잘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즐거움을 누리는 데 그리 많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중학교 동창 친구가 고맙게도 퇴직을 한 나를
배려해 너무나도 저렴한 가격으로 편안한 사랑방을 내어주니, 친구의 따뜻한 눈빛과 배려 속에서 자주 어울려 한 게임씩 즐길 수 있는 이 환경이 얼마나 감사한 인복(人福)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정이 내 노년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인생 후반기의 삶도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날마다 화려하고 거창한 대박은 아닐지라도, 삶이 굽이치는 길목마다 오늘처럼 버디나 이글 같은 뜻밖의 기쁨이 종종 터져주는 인생. 지치지 않고 매일 숲을 걷고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내일이라는 선물이 또 나를 설레게 하며 기다려준다.
초록의 숲길에서 무거운 마음을 비워내고, 초록의 필드에서 다시 살아갈 희망을 채운다.
70대의 푸른 봄날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곳에 있다.
진짜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지도 않은 내일의 걱정에 저당 잡히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를 온전히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내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