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by자봉

6월의 이른 아침, 세상이 채 깨어나기도 전인 새벽 4시에 눈을 뜬다.

은퇴를 하고 공직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 어느덧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내 몸은 긴장 섞인 출근 시간의 생체 리듬을 기억하고 있다.

5월 말 이틀간의 사전투표 사무에 이어 6월 3일 본 투표일까지, 영등포와 구로의 한 투표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설렘보다는 엄숙함에 가까웠다.


새벽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13시간을 투표함 앞에 앉아 자리를 지켰다. 밀려드는 선거인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교대 시간도 없이 온종일 긴장 속에 긴 시간을 버텨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제 70세가 다 되어가는 나이인데, 내 건강이 과연 언제까지 이 무게를 버텨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도 했다.


하루 일당 15만 7천 원과 교육비 4만 원이라는 현실적인 보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은퇴 후에도 여전히 나의 능력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고마운 후배들의 신뢰에 보답하고 싶었고, 슬롯의 중요한 한 축을 내 손으로 지탱한다는 '일하는 보람'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관악산 입구)


고된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나니, 문득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온몸에 쌓인 피로를 씻어내고 고마운 후배들과의 점심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림선을 타고 관악산역으로 향했다.

참으로 몇 년 만에 찾아온 관악산 초입인가.


역에서 내려 마주한 관악산 입구는 내 기억 속 옛 풍경과 완벽하게 달라져 있었다.

옛날엔 등산객들을 불러 모으던 무질서한 노점상들이 즐비해 활기차면서도 복잡했는데, 이제는 그 자리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번듯하게 들어선 관악문화원과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가 나를 반겼다.


정문을 지나 잘 닦인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서니, 눈이 시릴 정도로 짙은 녹음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아이들이 자연을 배울 수 있는 유아 숲 체험장과 구청에서 정성스레 조성해 놓은 간이 물놀이 장이 들어왔다.

그 옆을 흐르는 관악산 계곡물은 여름의 문턱에서 눈이 시리도록 맑고 깨끗했다.

신록이 우거진 길을 걷다 보니, 마음은 자연스레 30년 전 공직 생활의 한가운데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갔다. 현직에 있을 때, 봄가을이면 토요일마다 전 직원이 한데 모여 이곳 관악산으로 체련대회를 오곤 했다. 땀 흘려 산을 오르고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한 잔에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던 시절. 정이 넘치고 끈끈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계곡물소리 위로 아른거렸다.


오늘 만난 후배 팀장의 이야기가 귓가를 스친다. "선배님, 요새는 세대도 많이 바뀌고 젊은 직원들과 여성 공직자들이 많아져서 그런 봄가을 체련대회는 아예 없어졌어요.

옛날 같은 끈끈한 정이나 사람 사는 재미가 덜해서 가끔 아쉽습니다."

시대의 흐름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씁쓸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올드보이의 마음인가 보다.

우렁찬 소리를 내며 세차게 쏟아지는 인공 폭포수 앞에 멈춰 섰다.


새롭게 조성된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며 발끝으로 전해지는 대지의 기운을 느껴본다.

며칠 전 제9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투표소에서 쌓인

피로가 시원한 산바람과 흙내음 속으로 서서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내 젊은 날 청춘을 다 바쳤던 일터는 변했고, 산천도 변했으며,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세대도 바뀌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내가 여전히 이 슬롯의 구성원으로 가끔씩이라도 소임을 다할 수 있다는 자부심, 그리고 지친 몸을 온전히 품어주는 이 푸른 자연의 넉넉함이다.


앞으로도 가끔은 이 싱그러운 나무 냄새와 포근한 흙내음이 그리울 때면, 홀로 관악산을 찾으리라.

이 숲길을 걸으며 복잡한 생각도 정리하고, 남은 인생을 더 건강하고 밀도 있게 채워갈 에너지를 채워야겠다.

관악산의 세찬 폭포수가 내일의 나를 향해 시원한 응원을 건네고 있다

오늘도 건강. 내일도 건강을 유지하면서 즐거운 인생

후반기를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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