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고개를 하나씩 넘어 칠십 고개에 다다르고 보니, 문득문득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지는 풍경들이 있다.
그 풍경 속에는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이 고개를 내밀고, 채 다하지 못한 인연의 아쉬움들이 눈물처럼 고이곤 한다.
(고종 사촌동생 규현이)
나에게는 고종사촌 동생이었던 규현이가 바로 그런 존재다. 규현이의 기억을 떠올리려면, 우선 내 젊은 날 기억의 한 축을 담당했던
부산 연산동의 거친 언덕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고모부님과 고모님은 시골 고향을 떠나 저 멀리 부산광역시 연산동에 터를 잡으셨다.
말이 좋아 연산동이지, 그 시절 그곳은 배산 기슭을 따라 옹기종기 무허가 판잣집과 가파른 골목길이 이어지던, 삶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달동네였다.
고모부님은 자식들의 교육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시던 분이었다.
척박한 타향살이 속에서도 자식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 어려운 형편 속에서 경제적 교육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배산 기슭의 좁은 판잣집에서 고모님과 고모부님은 참으로 눈물겨운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고모님은 자식들을 차례로 낳아 기르셨다. 첫째 규현이부터 시작해 규옥, 그리고 막내 규상이까지. 배산의 가파른 등성이를 닮아
억척스러우면서도 심성이 고왔던 남매들이 그곳에서 자랐다.
내가 살던 고향 우리 집과 고모님이 계신 부산은 지리적으로 너무나 먼 거리였다. 지금처럼 고속열차가 씽씽 달리는 시절도 아니었으니,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길은 그야말로
큰 맘을 먹어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질 법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고모집 식구들에게 늘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부산에 갈 일이 생기면, 아무리 일정이 바쁘고 피곤해도 연산동 배산 기슭의 고모집만큼은 거르지 않고 꼭 들르곤 했다.
강원도 인제 원통 12사단에서 현역으로 젊은 시절 병영생활을 할 때 휴가를 나가 들리면 나를 유독 반기며 따르던 아이가 바로 고종 사촌 동생인 규현이었다.
( 정기휴가 때 고모집에 들렀던 현역병 시절)
세월은 흘러 나도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 되었고,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하기 전 그러니까 아직 인생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기 전의 어느 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산에만 늘 갇혀 살던 고종 사촌 동생 규현이가 훌쩍 서울로 나를 찾아왔다.
"형, 저 서울 구경 좀 시켜주십시오."
더벅머리에 때 묻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규현이는 서울의 높은 빌딩과 수많은 인파를 보며 연신 신기해했다.
나는 나를 믿고 먼 서울까지 찾아와 준 동생이 대견하기도 하고 반가워서, 당시 서울의 명소였던 남산공원으로 규현이를 데리고 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던 서울역 주변이었을까, 아니면 남산타워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넓은 광장이었을까. 우리는 그곳에서 완연한 서울의 봄바람을 맞으며 함께 걸었다.
남산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산 배산 기슭에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청춘의 고민,
그리고 언젠가 성공해서 고모님과 고모부님을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규현이의 야무진 꿈까지.
규현이는 내 앞에서만큼은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다 털어놓았다.
나 역시 집안의 장남으로서 느끼는 바카라임감과 서울 살이의 외로움을 동생에게 넌지시 건네며, 서로를 격려했다.
그때 남산의 한 모퉁이에서 카메라를 들고 찍었던 사진 한 장이 있다.
빛바랜 흑백색 사진 속에서 이십 대 후반의 나와, 나를 유독 잘 따르던 풋풋한 규현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활짝 웃고 있다.
그것이 규현이와 내가 함께 누렸던 가장 눈부시고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인생이란 참 묘해서, 그 시절에는 그 사진이 그렇게 소중한 보물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 수많은 물건이 사라지고 흩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남산에서의 사진 한 장만큼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롯이 살아남았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것은 내 고종사촌 동생 규현이의 지상에서의 모습을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이자,
내가 규현이를 추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사진 속 규현이는 여전히 이십 대의 푸르른 청춘으로 머물러 있는데, 사진을 바라보는 사촌 형은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있으니, 인생의 무상함에 가슴이 저려올 뿐이다.
인생의 모진 바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규연이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고 내 삶의 무게에 치여 살아가던 어느 날, 문득 동생의 안부가 궁금해져 고종사촌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올 동생의 정겨운 목소리를 기대했던 나에게 돌아온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오빠... 규현이 오빠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고모의 딸이자 규현이의 누이동생인 규옥이의 목소리는 이미 물기 가득 젖어 있었다. 규현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전화를 들고 있던 내 손이 부르르 떨렸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깜짝 놀라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저 수화기를 붙잡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규옥이의 말에 의하면, 규현이는 세상을 살아가며 심적으로 정말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부산 배산 기슭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쟁투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병이 깊어졌던 모양이다. 내성적이면서도 바카라임감이 강했던 아이였기에, 그 무거운 삶의 무게와 정신적 고통을 주변에 나누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만 삭여내다가 결국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린 것이었다.
"아이고, 규현아... 왜 그랬느냐. 그 모진 고통을 조금만 더 참고 견뎌내지..."
가슴속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그 험난한 고비를 잘 참아내고 극복했어야 했는데, 무엇이 그리 괴롭고 급해서 서둘러 가버렸단 말인가.
사촌 형인 내가 서울에서 보증금 50만 원에 옥탑방에서 월세를 살면서 내 한 몸 건사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사촌동생이 그토록 힘들고 외로워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는 자바카라감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만약 규현이가 살아있었다면, 이제 오십 대 후반이 되어 인생의 중년기를 지나고 있을 나이다.
머리에 희끗희끗하게 새치가 앉은 모습으로 서로 마주 앉아 소주 한잔 기울이며
, "형님, 그때 남산 기억나십니까?" 하고 호탕하게 웃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 모든 가정이 부질없는 환상이 되어버렸다.
(1980년대 어느 날 서울 남산공원)
규현이가 살아 있으면 오십 대 후반의 장성한 동생이
되어 있을 터인데, 이제 내 손에는 여전히 이십 대 후반에 멈춰 서 있는 남산 사진 속의 어린 규현이 사진만 달랑 한 장 남겨져 있을 뿐이다.
동생이 너무 빨리 가버려 너무나 애석하고, 보고 싶은 마음은 그리움의 경계를 넘어 원망으로까지 번져간다.
규연이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이십 년 전 우리 집안이 겪었던 잔혹했던 잔혹사와 내면의 상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뼈아팠던 그 시절, 나 역시 친척들과의 모든 연락을 끊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정형편이 빈곤한 우리 집안의 장남이었다. 청년 시절부터 장남이라는 무게감은 늘 어깨를 짓눌렀고, 나는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바카라임감으로 서울에서 밤낮없이 치열하게 일했다.
주경야독을 하면서 바카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공부하여
취업이 된 이후에 조금씩 삶의 기틀을 마련하고,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조카가 서울에서 생활기반을 잡고 조금 잘살기 시작하니, 축하는커녕 시기와 질투의 독버섯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라난 모양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피를 나눈 작은아버지들과 남동생이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터무니없는 허위 투서를 한 것이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들을 지어내어 졸지에 감사실에 들려 해명하고 경찰서와 검찰청에 출석해
무혐의를 받았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마음의 문을 걷어 잠갔다.
조사를 받을 때의 그 모멸감과 억울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할 친척들이,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얼마 되지 않은 내 재산에 탐욕을 부리고
명예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괴롭고 힘들었다. 밤마다 심야에
울리는 전화와 핸드폰 소리에 시달렸고, '도대체 피붙이라는 존재들이 왜 내게 이러는 걸까' 하는 인간적인 배신감에 피눈물이 흘렀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고통스러웠으면 친척이라는 이들과 연을 끊어버렸겠는가. 나는 그때 결심했다. 이 무서운 인간들과는 다시는 엮이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작은아버지들을 비롯한 모든 친척과의 연락을 칼로 무 자르듯 끊어버렸다.
주변의 온라인 게임 동료들이나 지인들도 내 사정을 알고는 혀를 내둘렀다.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친척이라도 너무 믿지 말고 늘 경계하며 사십시오.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속 편합니다.
" 그들의 말처럼 나는 철저히 문을 걸어 잠갔다.
내 가정을 지키고 내 정신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단절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촌들 간에도 왕래가 뚝 끊겼고, 명절이 되어도 고향 땅을 바라보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환멸과 불신으로 가득 찼던, 그야말로 상처뿐인 세월이었다.
작은아버지들과의 갈등 그리고 온 집안을 엉망진창 만들어 버리고 이혼해 버린 남동생 부부 때문에 괴로워하며 모든 친척과 연을 끊고 지내는 동안, 나를 그토록 따랐던 고종사촌 동생 규현이는 부산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다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가버린 것이 아닌가.
'친척들은 다 괴물 같은 존재들'이라며 도맡아 원망하는 사이에, 아무런 죄도 없고 오직 사촌 형을 향한 순수한 애정만 품고 있던 동생마저
단절의 벽 너머에서 외롭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서글펐다.
나를 잘 따르던 고종 사촌 동생이었는데, 이 형이 세상에 지쳐 연락을 끊고 사는 동안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이제 고모부와 고모님도,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고모집의 장남이었던 규현이 마저 먼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사촌 동생 규현이를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증오와 원망의 찌꺼기들이 한순간에 부질없게 느껴졌다.
과거에 작은아버지들에게 받았던 상처가 아무리 크고 깊다 한들, 그것 때문에 남은 사촌 동생들과의 천륜까지 저버리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죽고 나면 이 모든 원한과 시기 질투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 때가 되었다.
지나간 세월의 서운함은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내고, 아직 내 곁에 숨 쉬고 살아있는 사촌 동생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살아가는 안부를 물으며, 가슴속에 남아 있는 혈육의 정을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해본다.
그것이 먼저 떠난 규현이가 남은 사촌 형에게 주는 마지막 인생의 교훈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서랍을 열어 수십 년 전 남산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을 꺼내어 본다.
사진 속 규현이는 여전히 이십 대의 맑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규현아!
그곳에서는 더 이상 괴롭지도, 외롭지도 않으냐?
이 못난 형이 미안하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해라."
몇 년 전 여름 6월에 말 한마디 없이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린 규현이가 너무나 애석하고 사무치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