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유리창에 비친 글자를 읽다가 한참을 서 있었다.
“여름날, 할머니를 그리다.”
빗소리가 그쳤다는 문장 앞에서 마음도 함께 멈추었다. 멈춤과 시작, 그 찰나의 순간. 그 문장은 꼭 내 기억을 건드리는 열쇠 같았다. 비가 그치면 마당의 흙냄새가 먼저 올라왔고, 그다음은 우물가에 서 계시던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따라왔다.
내 유년의 여름은 언제나 우물가에서 시작되었다.
봉숭아꽃이 붉게 피던 날이면 할머니는 작은 소쿠리를 들고 마당을 돌았다.
여름밤이면 우리 집 마당 끝 감나무 가지에 둥근달이 걸렸다.
볏짚과 소나무 가지로 모깃불이 피어오르고, 나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옛이야기를 들었다. 호랑이 이야기도 있었고, 사람 사는 이치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남의 눈물 위에 서면 오래 못 간다.” 그 말씀들은 어린 내게는 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지금까지도 빠지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나는 공직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때마다 떠오른 것은 법 조항보다도, 지침서보다도, 할머니의 낮은 음성이었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라.” 그 한마디가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이제는 나도 머리가 희끗해졌다. 여름이 와 고향의 쓸쓸한 생가를 방문하면 지하수 우물은 있지만, 할머님과 함께 보고 감상했던 맨드라미꽃도 봉숭아꽃도 이제는 없다.
할머님도, 부모님도 다 떠나시고 빈집 같은 고향집에 나 홀로 내려와 깊은 잠을 청하면 마당에서는 바스락바스락 들 고양이들이 요란하게 몰려다니는 소리만 들린다.
마음이 우울하고 울적할 때 그리운 내 고향에 내려와 깊고 깊은 산촌의 인적도 드문 서너 가구가 떨어져 너무나 외롭고 고독한 내 고향! 빈집 빈방이어도 대충 청소를 하고 나 홀로 가만히 이불을 덮고 방바닥에 들어 누워 있으면 떠나버린 부모 형제와 할머님의 향수가 그립다.
옛날 옛적 고향집에 봉숭아와 맨드라미꽃은 없지만,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도 항상 마음이 편안한 내 고향집이 좋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사람이 떠나가고 남기는 것은 결국 사랑의 흔적이라고......
봉숭아꽃처럼 붉게 물들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도 은은히 남아 나를 지켜주는 힘.
오늘도 여름이다.
어디선가 봉숭아꽃이 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꽃보다 먼저 장손자라고 항상 예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할머님이 그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