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의 지평선이 넓어지고, 그동안 살아온 세월의 두께만큼 타인의 아픔을 품어줄 수 있는 품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세월의 훈장처럼 흰머리가 늘어갈수록, 지혜의 깊이 대신 고집의 두께만 두꺼워지고, 따뜻한 위로 대신 타인의 가슴에 서슴없이 대못을 박는 거친 언사들을 마주할 때면 가슴이 쓸쓸해진다.
종종 참여한 어느 모임의 기억이 아련한 통증으로 남아있다.
인간은 슬롯적 동물인지라 나이가 들어도 사람들과 어울려 온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만, 어떤 이들과의 만남은 오히려 영혼을 피로하게 만들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게 만든다.
직설적으로 뱉는 칼날 같은 말도 아프지만, 더 교묘하게 말을 돌려가며 듣는 이의 감정을 은근히 긁어놓고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이들의 대화법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상대를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깎아내리고,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비수를 숨긴 채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기제였다.
말이란 참으로 묘해서, 내뱉은 사람은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그 말을 정면으로 받아낸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퍼런 멍으로 남는다. 특히 삶의 가장 취약한 순간, 육체의 질병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간절하게 버텨내고 있을 때 들려오는 타인의 무심한 독설은 단순한 상처를 넘어 생의 의지마저 꺾어놓기도 한다. 나는 오늘 내 가슴속에 박혀 있던 그 아픈 가시들을 하나씩 빼내어,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언어의 품격’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보고자 한다.
ㅡ 6개월의 기다림, 그리고 무너진 가슴
인간에게 건강을 잃는 것만큼 두렵고 외로운 싸움은 없다. 어느 날 찾아온 건강의 적신호, 췌장에 생긴 낭종(혹)이라는 진단은 내 삶의 시계를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르게 만들었다.
6개월에 한 번씩 찾아오는 대학병원으로의 발걸음은 늘 도살장에 끌려가는 이처럼 발목이 무겁다.
40분 동안 차가운 기계 속에 들어가 사방을 에워싸는 기괴한 굉음을 견디며 내시경과 MRI 검사를 받는 일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이자 절박한 생의 몸부림이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그 몇 주간은 온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 거문고 줄 같다. 작은 통증 하나에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혹여나 그 혹이 나쁜 길로 접어들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며 온갖 기도를 올리게 된다. 그토록 긴장하고 위태로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던 어느 날, 나이가 많은 어른이 내 건강 상태를 전해 듣고는 너무나 쉽게 입을 열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유난스럽게 걱정을 하고 그래? 어차피 사람은 나중엔 다 죽으면 끝이야. 땅 한 평 주어지면 그만인 것을. 묘지 갈 때 가져갈 것도 없고 뭐 그럴 것인데, 차라리 빨리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가고 좋은 일이지, 뭘 그리 벌벌 떨고 그래."
그 순간, 내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다 못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선배의 눈에는 내가 그저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힌 유약한 인간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생과 사의 기로에서 가족들을 생각하며 고민하며 버텨내는 숭고한 시간이었다.
죽으면 땅 한 평으로 돌아간다는 인생의 허무를 몰라서가 아니다. 다만 단 하루라도 더 사랑하는 이들의 곁에 건강한 모습으로 머물고 싶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도 처절한 소망을, 그는 '빨리 죽으면 좋은 곳 가니 잘된 일'이라는 잔인한 문장으로 난도질해 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정이 완전히 떨어졌다. 그가 아무리 나이가 많고 슬롯적 경험이 풍부하다 한들, 타인의 고통을 이토록 가볍게 조롱하는 자의 언어는 소음일 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이 먹으면 저절로 저렇게 말이 거칠어지는 법"이라며 허허 웃어넘기라고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품고 있는 온기가 깊어져야 하거늘, 도대체 왜 저 양반의 혀는 이토록 차갑고 뾰족해지는 것일까. 대화의 필요법을 잃어버린 노년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기피해야 할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ㅡ 집안의 어른, 꼬투리를 잡는 혀의 비극
이러한 언어의 폭력은 비단 남남이 모인 슬롯적 모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피를 나눈 가족과 친척들이 모이는 집안의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말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어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어른이라는 권위를 가진 이들이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깊은 탄식이 흘러나오곤 한다.
우리 집안의 어르신들도 평소에 말씀을 참 함부로 하셨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나 아랫사람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애썼다"는 따뜻한 격려 한마디 건네면 좋으련만 칭찬보다는 장 조카의 약점과 헛점을 찾으려고 하고 근거도 없이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처럼 헛소문을 내고 다닌다.
그분들의 시선은 언제나 아랫사람들의 약점과 실수, 혹은 미흡한 점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듯했다.
성격이 평생 간다는 말처럼, 젊은 시절 가졌던 그 날카롭고 공격적인 성격은 나이가 들어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른이라는 완장까지 더해져 주변 사람들을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다. 아랫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꼬투리를 잡아서 자신이 여전히 집안의 중심이자 권력자임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그 비뚤어진 대화법 때문에, 결국 친척 간의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천륜으로 맺어진 가족마저도 혀끝에서 나온 몇 마디의 독설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현실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세상의 거친 풍파에 지친 영혼이 돌아와 쉴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여야 한다.
그 안식처의 주인인 어른들이 문턱에 서서 칼날 같은 말로 조카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면, 어느 자식이 그 집안의 문을 기쁜 마음으로 두드리겠는가. 언어의 대화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들이 가득한 집안은 몰락해 가는 성벽과 같다.
ㅡ. 나이가 들수록 언어를 가려내야 하는 이유
흔히 나이가 들면 베풀 것이 많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갑을 열어 돈을 베푸는 것보다 더 고귀한 보시는 바로 입을 열어 '좋은 말'을 베푸는 것이다. 불가(佛家)의 가르침 중에 무재칠시(無財七施), 즉 재산이 없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화향시(和香施)와 언사시(言辭施)이다. 부드러운 얼굴빛과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수만 금의 재물을 기부하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는 느려지지만, 감정의 상처를 기억하는 기억력은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대화하는 방법은 더욱 신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내가 한 세상을 먼저 살아왔다는 이유로 아랫사람이나 타인의 삶을 다 안다는 듯이 훈수를 두거나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에는 세 가지 온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소의 언어'다. 상대방의 불행이나 아픔을 보며 "죽으면 끝"이라거나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떤다"며 비웃는 말들이 이에 속한다. 이는 상대의 영혼을 얼려 죽이는 살인과 같다.
둘째는 미지근하여 아무런 감흥이 없는 '방관의 언어'다. 영혼 없는 대답과 기계적인 리액션은 대화의 단절을 가져온다.
셋째는 가슴을 데워주는 '체온의 언어'다. 상대의 아픔에 눈 맞추고, "얼마나 힘들었겠니", "내가 기도로 함께하겠다"며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언어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그가 가진 부(富)나 명예에 있지 않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가, 즉 그가 구사하는 '체온의 언어'의 깊이에 따라 노년의 품격이 결정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내 입안에서 맴도는 말들을 그냥 내뱉지 말고, 반드시 체온의 필터로 걸러서 내보내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ㅡ. 군자의 침묵, 그리고 가려 쓰는 언어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 했다. 말을 교묘하게 잘 꾸며대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아부하는 사람치고 인자한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 모임에서 은근히 말을 돌려가며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이들이 바로 이 교언(巧言)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화의 기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인(仁)의 마음, 즉 타인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통째로 결여되어 있다.
성현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강조한 노년의 도리는 명확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입은 무겁게, 행동은 지속하게, 말은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
입을 무겁게 하라는 것은 무조건 벙어리처럼 침묵하라는 뜻이 아니다. 내 입을 떠난 말이 타인에게 가닿을 때 생길 파장을 생각하며, 말의 양을 줄이고 경청의 시간을 늘리라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대화의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려 하지 말고,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어야 한다. 아랫사람이 말을 할 때 끝까지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노년은 충분히 아름답다.
또한 행동은 지속하고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말만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노인은 추하다. 자녀들에게 "우애 있게 지내라"라고 말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형제들과 화목한 모습을 보이고, "바르게 살아라"라고 훈계하기 전에 본인의 삶이 정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말은 철저하게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 밭에 씨앗을 뿌릴 때도 좋은 씨앗만 골라 심듯, 입 밖으로 내보낼 언어도 엄격하게 선별해야 한다. 비난의 말, 조롱의 말, 시기의 말, 꼬투리를 잡으려는 음해의 말들은 과감히 입안에서 씹어 삼켜버리고, 오직 격려와 위로, 칭찬과 사랑의 말들만 골라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오래 산 자가 지녀야 할 마땅한 의무이자 도리다.
ㅡ 내 삶의 정원에 향기로운 꽃을 심으며
질병과 노화라는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고독하고 두려운 여정이다. 6개월마다 병원 문을 들어서며 마주하는 그 두려운 순간마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적 독설이 아니라, "그동안 잘 버텨왔으니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라는 따뜻한 안부와 위로 한마디였다.
내가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거울삼아, 나는 오늘 다시 한번 내 삶의 태도를 굳건히 다잡아 본다. 나를 아프게 했던 그 누구처럼 늙지 않으리라.
내 집안의 아랫사람들에게 꼬투리를 잡으며 권위를 내세우는 옹졸한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타인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내 입술이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도구로 쓰이지 않도록 매 순간 깨어 있으리라 다짐한다.
비록 내 몸에 작은 낭종이 자라고 있고 세상의 거친 말들이 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을지라도, 내 영혼의 정원만큼은 황폐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내 입을 통해 세상에 더 많은 희망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만나는 이들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건네고, 아픈 이들의 손을 먼저 잡아주며, 내 나이와 연륜이 타인에게 억압이 아닌 따스한 그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인생의 해 질 녘이 가까워질수록 언어의 품격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다. 내 남은 생 동안, 내 입술 끝에는 언제나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고, 내가 머물다 간 자리에는 달콤한 사랑의 열매만 맺히기를 소망한다. 입은 무겁게 닫고 발걸음은 깊고 묵묵하게 옮기며, 진정한 어른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해 본다. 내가 뿌린 그 따뜻한 언어의 부메랑들이, 언젠가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포근하게 감싸 안아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