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물길 위에 띄운 근심

한강버스로 뚝섬까지

by자봉

​* 좁은 통 속의 시간과 강물 위의 시간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작은 감옥'을 하나씩 품고 산다.

내게는 6개월마다 돌아오는 췌장 MRI 촬영 통이 바로 그곳이다. 벌써 3년째, 일 년에 두 번씩 도합 여섯 번을 그 좁고 딱딱한 기계 속에 몸을 뉘었다.

40분이라는 시간은 밖에서는 차 한 잔 마실 짧은 찰나이지만, 폐쇄된 공간에서 눈을 감고 기계의 기계적인 소음을 견뎌야 하는 이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다.


​내일은 일요일인데도 아침 9시 예약이 잡혀 있다.

췌장 내시경, CT, MRI까지…. 이제는 지겨움을 넘어 몸서리가 처질 법도 한데,

이번에는 마음이 더 심란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식단까지 철저히 관리하며 인생의 후반기를 정갈하게 가꾸어 왔건만, 몸속의 낭성 종양은 무엇이 그리 미련이 남았는지 여전히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아무거나 먹고 편하게 사는 이들이 부럽다"는 탄식이 절로 나오던 차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스트레스라는 놈은 가만히 있으면 마음을 갉아먹지만, 움직이면 발치 아래에서 흩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퇴직 후에도 여전히 든든한 벗이 되어주는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 먼저 퇴직한 54년생의 장 선배에게 연락을 취했다. “선배님, 오늘 한강 버스 한번 타러 가시지요.” 바로 ok라는 응답이 왔다

​* 여의도에서 띄운 첫 항해, 한강 버스의 설렘

​여의도 선착장은 토요일을 맞이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노란 머리의 외국인 관광객들과 나들이 나온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섞여 활기를 띤다.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해 한강 버스에 올랐다.

이 배는 여의도에서 뚝섬으로 바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허리를 굽이돌아 압구정 선착장을 거쳐 잠실로 향하는 도중에 뚝섬 선착장에 하선하는 한강 버스이다


​교통카드를 찍으니 단돈 3,000원. 65세를 넘긴 우리에게 지하철은 무임이지만, 이 한강의 물길을 가르는 배는 그 정도의 대가를 치를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배가 선착장을 밀어내며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자, 가슴속에 엉겨 붙어 있던 내일의 걱정들도 하얀 포말이 되어 부서져 나갔다.


​첫 번째 기착지인 압구정 선착장을 지나고, 또 하나의 정류장을 거쳐 드디어 뚝섬 선착장에 닿았다.

평생을 서울 근처에서 살아왔고, 온라인 게임 생활 40년을

하다 보니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어느 정도는 안다 그렇지만 한강 배를 타고 내린 뚝섬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난생처음 이곳에 발을 내디딘 내 가슴은 소년처럼 설레었다.

(한강버스 배 승선후)


​* 자양역의 변신과 8,000보의 성찰

한강버스라는 ​배에서 내리니 'kid Place'라는 이름의 공간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게 꾸며진 모습이 여의도 한강공원과는 또 다른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선착장에서 조금 걷다 보니 7호선 지하철역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분명 ‘뚝섬유원지역’이라 불렸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자양역’이라는 새 이름을 달고 있었다. 세상은 이토록 빠르게 변하고 이름마저 바꿔가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 또한 과거의 병증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양역 근처 한강 공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가까이 야외 수영장도 보이고, 강바람에 일렁이는 버드나무도 반가웠다. 장 선배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만보기의 숫자가 8,000보를 훌쩍 넘어섰다. 매일 8,000보에서 1만 보를 걷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오늘도 지켜낸 것이다.

이 발걸음 하나하나가 내 췌장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역 근처 식당을 찾아 제육볶음을 주문했다. 늦은 점심이라 시장기가 돌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 땀 흘리고 먹는 밥맛은 꿀맛보다 달았다. 이어지는 커피 타임. 향긋한 커피와 함께 곁들인 간식은 인생의 쓴맛 뒤에 찾아오는 짧은 단맛 같았다.

*. 거미줄처럼 이어진 서울, 그리고 감사

​돌아오는 길은 지하철을 이용했다. 자양역에서 고속터미널역을 거쳐 9호선 급행으로 갈아타고, 다시 여의도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해 집으로 향했다. 서울의 지하철은 정말이지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편리했다. 무임승차의 혜택까지 누리니, 오늘 하루 한강 버스비와 점심값, 커피값을 다 합쳐도 1만 원 남짓밖에 들지 않았다. 만 원의 행복이 이런 것일까.


​집에 도착해 내일 병원에 갈 준비를 한다.

며칠 전 어버이날이라고 딸들이 사준 선글라스를 정리하고, "아빠, 얼굴에 좀 바르고 다니세요"라며 건네준 화장품도 눈에 들어온다. 외국계 큰 회사에

다니는 큰딸과 기자인 작은딸.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빠라는 자부심이 울컥 차오른다.

그래, 나를 이렇게 아껴주는 가족이 있고, 함께 걸어줄 선배가 있고, 만 원으로도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이 서울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 췌장 낭종에게 고함

​내일 아침이면 나는 다시 차가운 MRI 기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40분 동안 눈을 감고, 오늘 보았던 한강의 푸른 물결을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여의도에서 뚝섬까지 나를 실어 나르던 그 시원한 강바람이 기계의 소음을 잠재워주길 바란다.

췌장의 낭종에게 오늘도 조용히 말을 건네본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며, 너를 달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었는지 너도 알지 않느냐고. 하지만 설령 네가 내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하더라도, 나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나는 내일도 모레도 서울의 공원을 찾을 것이고, 딸들이 사준 선글라스를 끼고 당당히 세상 속을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기는 건강이 최고고 그다음이 돈이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 즐겁게 살겠다는 의지'임을 오늘 한강 위에서 깨달았다. 검진은 지겹지만, 나는 여전히 즐거운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다. 내일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오늘보다 더 환한 햇살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소망해 본다.

(롯데타워도 보인다)


(뚝섬선착장의 전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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