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날

by쫄보 원더우먼


오늘은 아버지가 퇴원하신 날이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하셨다.

노인들의 큰 수술 후 나타나는 섬망이라고 했다.



깜빡, 깜빡. 방금 하신 말씀을 다시 하시고

방금 들으신 대답을 다시 물으셨다.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했다. 처음 듣는 질문인 것처럼.


집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죽을 쑤는 일이었다.

불을 줄이고, 눌어붙지 않게 계속 저었다.

쌀알이 풀어지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앞에 서 있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차라리 좋았다.


몸이 약하신 어머니를 스물네 시간 곁에서 돌봐 주시는 간병인 선생님이 계신다.

어머니의 배설들로, 빨레가 한 가득이다.

이제 아버지까지 그 집으로 오셨다.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오늘부터 조금 더 늘어난 셈이다.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고 싶어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반찬도 만들어 놓고

일주일치 장을 보았다.


냉장고를 채우고,

자주 쓰는 것들은 손 닿는 자리에 옮겨 놓고,

기저귀 같은 소모품들을 다시 사다 놓았다.


하루를 통째로 빼서 온 날이었다.

필요한 것을 드리고 왔다는 뿌듯함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집을 나서는데, 해가 기울고 있었다.

뿌듯함이 먼저 왔고 그 뒤로 어스름한 것들이 따라왔다.

우울, 두려움, 슬픔.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옅은 회색 같은 감정.


나는 이런 날 스위치를 끈다.

"아니.. 스위치를 끄려고 노력한다"


감정을 참거나, 견디거나, 이겨 내는 게 아니다.

그건 오히려 감정을 길게 끌고 간다.


딸깍


장면을 바꾸는 것.

바카라을 펴거나,

낯선 자리에 잠깐이라도 나를 데려다 놓는 것.

그러면 방금까지 보이던 화면이 꺼지고 다른 화면이 켜진다.


아주 잠깐이어도 괜찮다.

카페건, 바카라이건

그 잠깐이 나를 살린다.


그래서 오늘도 북카페에 갔다.

바카라을 한 권 골라 앉았다.


『오프먼트』, 장재열. 이백열한 쪽.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살면서 아무 걱정 없이 꽃을 바라볼 수 있는 계절이

과연 몇 번이나 남아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부모님 중 한 분이 편찮으실 테고,

그때는 일과 간병을 함께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그다음에는 이별이 올 테고,

이별한 뒤에 다시 꽃을 보게 되면

그때도 지금처럼 편안한 마음일 수 있을까,

그때는 "살아 계실 때 모시고 올걸"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그 시기마저 지나면

이번엔 내가 아파서 병원을 오가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러니 마음을 온전히 비워 두고 꽃을 볼 수 있는 시기가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오프먼트』(장재열) p211


소름이 끼쳤다.

내가 오늘 왜 우울했는지, 왜 두려웠는지, 그 정체가 거기 적혀 있었다.

나는 오늘 하루가 힘들어서 슬펐던 게 아니었다.

오늘 같은 하루가 앞으로 계속될 거라는 걸 알아서,


그리고 그 하루들이 끝나는 방식도 이미 알고 있어서 슬펐던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상실이 오늘의 저녁을 미리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다짐했다.

하나는, 스위치를 잘 끄고 켜는 일.

슬픔을 없애겠다는 게 아니라

슬픔이 오늘 하루를 다 먹어치우지 못하게 하는 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을 '충분히' 느끼도록 나를 배려하는 일.


대충 느끼지 말고, 미루지 말고,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제대로 누리겠다고 하지 말고.


오늘 죽 위로 올라오던 하얀 김.

장 본 봉지가 무거워서 팔이 저렸던 감각.

간병인님이 웃으며 고맙다고 하시던 목소리.


아버지가 나를 못 알아보시다가 잠깐 알아보시던 그 짧은 몇 초.

이런 것들을 흘려보내지 말 것.


지금 이 계절에 나에게 허락된 것들은 생각보다 짧을지도 모르니까.


마음 편히 꽃을 볼 수 있는 날은 무한하지 않다.

그러니 오늘, 잠깐이라도 고개를 들어서 제대로 보기로 하자.

우리 그거 잊지 말기로 해요.


스위치를 끄고 켜는 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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