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전화 한 통이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날,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서른 해 가까이 노년학을 공부하고, 치매 정바카라과 통계를 들여다보고,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 병의 경과를 설명해 온 사람이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울었다.
나는 이 병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시점에 무엇을 잃게 되는지, 가족이 어디쯤에서 무너지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막연해서 두렵고, 아는 사람은 선명해서 두렵다. 그날 나는 아는 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참을 울고 나니 이상하게도 문장 하나가 남았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슬픔은 슬픔대로 두고, 손은 손대로 움직이자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때 했던 일들을, 그리고 그때 놓쳐서 나중에 아쉬웠던 일들을 여기 적어 둔다. 지금 어딘가에서 같은 전화를 받고 계신 분께 닿았으면 해서.
먼저, 오늘 다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진단서를 받아 든 날 사람들은 요양원부터 검색한다.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 앞으로 몇 년에 걸쳐 하나씩 하면 되는 일들이다.
다만 이번 달 안에 시작하면 좋은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거주지 보건소 안의 치매안심센터에 등록하는 것이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약제비 지원 신청, 기저귀 같은 조호물품, 배회감지기, 인식표, 가족교육, 자조모임까지 대부분이 이 한 창구로 연결된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도 괜찮다.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라고만 말하면 그다음은 그분들이 안내해 주신다.
또 하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장기요양인정을 신청하는 것이다. 의사소견서가 필요하고 공단 직원이 집으로 방문조사를 나오기 때문에 번거롭다. 복잡하고 시간이 걸려도 꼭 사시길.
장기요양등급은 1등급부터 5등급, 그리고 인지지원등급으로 나뉜다. 신체 기능은 아직 괜찮은데 인지 저하가 주된 경우에도 등급을 받아 주야간보호센터에서 인지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방문조사에 관해 한 가지만 덧붙인다.
어르신들은 조사원 앞에서 유독 또렷해지신다. 평생을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않으려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러니 조사 전 2주 동안 평소의 어려움을 메모해 두었다가 그날 보여드리시라. 밤에 있었던 일, 못 하시게 된 일, 같은 질문을 몇 번 하셨는지. 실제 상태가 반영되어야 필요한 만큼의 도움이 나온다.
가족이 ‘병’보다 먼저 공부해야 할 것은 ‘증상’이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의사 선생님은 진단과 약을 주신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그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까지 설명해 주실 여력은 없다. 그런데 가족을 무너뜨리는 것은 병 자체가 아니라 예고 없이 찾아온 증상이다.
같은 질문을 열 번째 하실 때, 없어진 지갑을 며느리가 가져갔다고 하실 때, 해가 지면 갑자기 안절부절못하실 때. 이해가 없으면 “엄마, 도대체 왜 그래!” 하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말을 뱉은 사람이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다. 나는 그런 가족을 정말 많이 봤다.
미리 알면 다르다.
저건 치매 가족이 아니라 병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 순간 한 번은 참아진다.
치매안심센터의 가족교육을 꼭 받으시고, 중앙치매센터 자료를 한 번은 읽어 두시라. 마음의 무너짐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도, 속도는 늦출 수 있다.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가장 많이 놓치고, 가장 뒤늦게 후회하는 영역이 여기다.
치매는 서서히 진행되지만, 어떤 일들은 판단능력이 남아 계실 때만 가능하다. 창이 닫히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재산과 계약을 대신 관리해야 할 때가 오면 성년후견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직 의사능력이 있으실 때라면, 신뢰하는 사람과 미리 계약을 맺어 두는 임의후견을 검토해 볼 수 있다.
통장과 보험, 자동이체와 공과금 현황도 형제자매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한 번 정리해 두시라. 나중에 가족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대개 돈이 아니라 ‘몰라서 생긴 오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그렇다. 본인이 직접 등록기관에 가서 작성해야 하고, 의사능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훗날 가족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결정 하나를, 어머니가 직접 덜어 주시는 일이다.
그리고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놓치지 마시라. 만 60세 이상이고 소득기준을 충족하면 치매 약제비와 처방 당일 진료비 본인부담금을 월 3만 원, 연 36만 원 한도로 지원받을 수 있다.
치매는 세법상 ‘항시 치료를 요하는 중증환자’에 해당할 수 있어, 병원에서 장애인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연말정산에서 추가공제도 가능하다. 장애인 등록과는 다른 제도다. 영수증과 처방전은 처음부터 파일 하나에 모아 두시길.
안전은 두 가지, 배회와 낙상이다
지문 등 사전등록은 오늘 당장 하실 수 있는 가장 빠른 일이다. 미리 등록해 두면 실종 신고 전이라도 경찰이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도 되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까운 지구대에 가도 된다. 5분이면 끝난다.
배회 조짐이 보이면 배회감지기와 인식표를 신청하시고, 집 안에서는 발에 걸리는 것을 치우시라. 문턱, 전선, 미끄러운 욕실. 낙상 한 번이 모든 것을 몇 년 앞당긴다.
물건은 늘 같은 자리에, 집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하게.
가장 어려운 대화는 아마 운전일 것이다. 면허 자진반납 제도를 활용하면 조금은 덜 상처받으며 정리하실 수 있다.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일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
돌봄은 한 사람에게 몰린다. 대개 딸에게, 며느리에게, 가까이 사는 자식에게.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환자보다 돌보는 사람이 먼저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역할을 나누시라.
돌봄, 금전, 병원 동행, 행정처리를 종이에 적어 나누고 정기적으로 공유하시라. 멀리 사는 형제가 할 수 있는 일도 반드시 있다.
카톡방을 만들고 이벤트가 있을때마다 공유했다.
간병인님을 찾고, 지불하는 과정과, 필요물품을 사드리고, 복지용구를 들이는 일등 끝없이 펼쳐지는 요양, 돌봄이라는 단계에서, 우리 가족은 모두 한방에서 그 과정을 공유했다.
쉬시라.
장기요양을 이용 중이라면 가족휴가제로 단기보호를 별도로 쓸 수 있다. 쉬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오래 걸어야 하는 길이라면, 쉬는 것도 돌봄의 일부다.
혼자 견디지 마시라.
치매가족 자조모임에 한 번만 나가 보시라.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의 한마디가, 어떤 자료보다 크게 위로가 된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치매상담콜센터 1899-9988에 전화하셔도 된다.
마지막으로
긴 싸움이 맞다.
그런데 이 길에는 혼자 견디라고 만들어 둔 제도가 아니라, 같이 견디자고 만들어 둔 제도가 이미 꽤 마련되어 있다.
겪어 본 사람이 따뜻한 한마디가, 카톡으로 힘내라고 보내주는 커피 한잔이, 식도연하곤란증을 호소하는 환자를 위해 보내주는 죽 쿠폰하나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다.
우리가 낸 보험료로 만든 것들이다. 다 알 필요는 없다. 치매안심센터 문을 한 번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하나만 더.
가족은 여전히 가족이시다.
기억은 흐려져도 감정은 오래 남는다. 오늘 나눈 대화의 내용은 잊으셔도, 오늘 손을 잡아 드린 그 느낌은 남는다. 그러니 자료를 찾느라 애쓰는 시간 사이에, 가끔은
그냥 옆에 앉아 계셔도 괜찮다.
나도 그날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은 아주 단순했다는 것을.
문득, 생각하지 않았던 순간 가족은 “고맙다”라고 하신다. “네가 수고가 많구나”하신다.
그리고 잊으시고 엄한 행동을 하신다.
울고 전화도 하셔서 하루 진을 다 빼놓기도 하시고
“사람 살려라. 긴급상황이다”라며 새벽에 전화를 마구 거신다.
그래도. 가끔 정신이 또렷해지는 시점에 고맙다는 한마디는 또 다시 힘을 내게 된다.
그럼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