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진 결과지를 들고, 열네 개를 세어봤다
봉투가 도착했다.
건강검진 결과지. 나는 그걸 며칠이나 식탁 위에 그냥 두었다. 뜯으면 뭔가 시작될 것 같아서. 뜯지 않으면 아직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아서.
쫄보답게, 결국 며칠 뒤에야 뜯었다.
그리고 알았다.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는 걸.
결과지에는 지난 몇 년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마른비만. 고혈압.
그리고 진단명 바로 아래,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지표들이 몇 줄.
숫자를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병명이 아니라 시간이 보였다.
가족의 병상 앞에서 보낸 시간. 내 끼니보다 누군가의 끼니가 먼저였던 시간. 병원 복도에서 자다 깨다 했던 밤들. 몸을 크게 다치고도 "괜찮아, 지나갈 거야" 하며 넘겼던 회복기. 그리고 요즘 들어 나도 모르게 예민해지고, 잠이 얕아지고, 체온이 널뛰는 이 낯선 계절.
가족의 일, 사고의 여파, 갱년기. 이 세 가지가 서로 얽혀 있었다.
말하자면, 나를 챙기지 못했던 시간의 청구서가 한 장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미안했다. 나한테.
그 무렵,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필 그때 나는 〈치매와 노인〉 강의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자료를 뒤지다 이런 숫자를 만났다.
2026년, 우리나라 치매 환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복지부·중앙치매센터, 「2023년 치매역학조사」 기준. 진단·등록된 인원이 아니라 추정 환자 수다.)
100만 명. 65세 이상 열 명 중 한 명꼴이다.
이 숫자를 강의실에서 띄우면 표정이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남의 일이라는 얼굴. 다른 하나는 이미 겪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얼굴.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되묻는다.
"나는 예외일 수 있을까요? 자신 있으세요?"
대부분 조용해진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면 꼭 이런 말이 따라온다. "어차피 치매는 치료제도 없다면서요. 그럼 예방도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절반만 맞는 말이다.
완치시키는 약은 아직 없다. 다만 최근에는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것을 목표로 한 약들이 등장했고, 국내에도 들어왔다. 모두에게 쓸 수 있는 것도, 기적을 약속하는 것도 아니지만—"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문장만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예방 쪽에는, 훨씬 더 분명한 자료가 있다.
45%. 랜싯 위원회가 계산한 숫자
2024년, 세계적 의학저널 『랜싯(The Lancet)』의 치매 위원회는 생애 단계별로 열네 가지 위험요인을 관리하면 전체 치매의 약 45%를 예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2020년의 열두 가지에 높은 LDL 콜레스테롤과 교정하지 않은 시력손실 두 가지가 새로 더해진 결과다.
45%. 절반에 가깝다.
나머지 55%는 유전과 나이 같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러니까 이 숫자의 진짜 의미는 이렇다.
치매는 통째로 운명도 아니고, 통째로 내 바카라임도 아니다. 다만 절반쯤은, 내가 손댈 수 있는 칸이다.
손댈 수 있는 칸이 절반이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결과지를 다시 꺼냈다.
자, 세어봅시다. 몇 개나 해당되는지
여러분도 검진 결과지 있으시죠? 서랍 어딘가에, 봉투째로.
꺼내서 같이 세어보자. 나부터 정직하게 세겠다.
〈어릴 때부터〉
1. 낮은 교육수준 — 이건 과거를 바꾸자는 말이 아니다. 뇌에 '여유분'을 쌓아두자는 말이다. 유튜브 릴스만 넘기지 말고, 평생교육 프로그램 하나, 바카라 한 권, 머리를 쓰게 만드는 무언가.
〈중년, 그러니까 지금 우리〉
2. 청력 손실 — "나이 들면 다 그렇지"라고 체념하지 마시라. 안 들리면 대화가 줄고, 대화가 줄면 세상이 줄어든다. 이어폰 볼륨 낮추기부터 시작하면 된다.
3. 높은 LDL 콜레스테롤 — 2024년에 새로 들어온 항목. 결과지에서 제일 먼저 찾아볼 줄.
4. 우울 — 갱년기의 가라앉음도, 노년의 외로움도 여기 들어온다. 나를 덮치기 전에 말하고, 필요하면 도움받자.
5. 두부외상 — 안전벨트. 헬멧. 이 두 개다. 겪어본 사람은 안다.
6. 신체활동 부족 — 덥다고 피하지 마시라. 노화의 속도를 실제로 늦추는 게 아직은 이것뿐이다.
7. 당뇨병 — 혈당 관리.
8. 흡연 — 아직도 피우고 계신다면… 뭘 믿고요?
9. 고혈압 — 약 드시는 분은 더더욱. 꾸준히가 핵심.
10. 비만 — 정상 BMI 유지. 마른비만도 여기 포함된다는 게 함정.
11. 과음 — 위로였던 술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진 않은지.
〈노년이 되면〉
12. 슬롯적 고립 — 코로나 이후 네트워크가 무너지고 "혼자가 편해"가 늘었다. 편한 것과 고립된 것은 다르다. 고립되지 않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13. 대기오염 — 개인이 어쩌기 어렵지만, 나쁜 날 창문 닫고 걷는 길을 바꾸는 정도는 할 수 있다.
14. 교정하지 않은 시력손실 — 이것도 2024년 신규. 백내장, 노안. 방치하지 말고 교정시력으로 살자.
세어보셨나요?
저는요, 부끄럽지만 꽤 여러 개에 해당됐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동그라미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이 열네 개는 저주 목록이 아니라 체크리스트였다.
동그라미가 많다는 건 그만큼 손댈 데가 많다는 뜻이고, 손댈 데가 많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뜻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이 좋다. 완치도 완승도 약속하지 않으면서, 알고 있으면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말해주니까.
그래서 정했다. 열네 개를 한꺼번에 고치겠다는 건 쫄보의 언어가 아니다. 그건 사흘 만에 포기하는 사람의 언어다.
두 개만.
비만과 고혈압.
결과지에서 가장 굵은 글씨로 나를 부른 그 두 개부터. 이건 우연히도 서로 손을 잡고 있는 항목이라, 하나를 건드리면 다른 하나가 따라온다. 그리고 이 둘은 열네 개 중 무려 절반과 이어져 있다. 혈당도, 콜레스테롤도, 신체활동도, 우울도.
두 개를 잡으면, 실은 여러 개가 같이 움직인다.
결과지는 통보가 아니라 초대장이었다
며칠이나 뜯지 못했던 그 봉투가, 지금은 냉장고에 붙어 있다.
무서워서 안 본 게 아니라, 이제는 자주 보려고.
나는 여전히 쫄보다. 다음 검진 때 또 며칠쯤 봉투를 못 뜯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르는 게 무서운 거지, 아는 건 무기라는 걸.
45%가 내 몫이라면, 나는 그 몫을 챙기겠다.
여러분도 오늘, 그 봉투 한번 뜯어보시죠. 저랑 같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