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원더우먼도 처음입니다 짬노트
예전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무조건 나가서 아파트를 걸었습니다. 대단한 결심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몸에 밴 습관이었어요. 그런데 그 산바카라길에는 저처럼 매일 나오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한쪽 발이 불편하신데도 워커를 밀며 꼬박꼬박 나오시던 어르신. 저를 볼 때마다 "새댁~ 새댁~" 하고 인심 좋게 불러주시던 귀여운 여자 어르신.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걷다가 만나고, 만나면 인사하고, 인사가 쌓이다 보니 가끔은 날씨 이야기도, 사는 이야기도 나누게 된 사이. 딱 그만큼의 거리였지요.
그런데 그 거리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걸 알게 된 날이 있었습니다. 교통사고로 한동안 산바카라을 나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나갔던 날, 어르신들이 저를 보시고는 마치 당신들 일처럼 걱정해 주셨거든요. 어디가 어떻게 다쳤느냐고, 그동안 안 보여서 얼마나 마음이 쓰였는지 아느냐고.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데, 마음은 이미 이웃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이 하나둘 안 보이시네. 처음에는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사를 가셨나? 그럼 다행인데.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만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혹시…… 돌아가셨나.
그 생각이 확신 비슷한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파트 지정 쓰레기장에 가끔씩 커다란 살림살이들이 나와 있을 때입니다.
자개장. 자개로 만든 경대.
레트로 무늬의 접시들. 수년은 족히 길렀을 커다란 화분. 연식이 느껴지는 두툼한 이불들. 그리고 친정에도 있는, 나무를 깎아 만든 클래식하고 우아한 의자들.
예전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겁니다. '아, 누가 새 가구를 들이셨나 보네' 하고요. 그런데 이제는 압니다. 저 물건들은 그냥 버려진 살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의 집에서, 한 사람의 긴 시절이 조용히 끝났다는 것을. 자개장 하나에 담겨 있었을 혼수의 설렘과, 화분 하나를 수십 년 길러낸 아침들과, 그 의자에 앉아 보냈을 수많은 저녁들이 거기, 쓰레기장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는 것을요.
그렇게 한 분, 두 분 사라지십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라서, 어느새 친구의 부모님이, 지인의 부모님이 떠나셨다는 소식도 하나둘 들려옵니다. 부고 문자를 받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도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이 생각이 저를 슬프게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 아침 산바카라길이 조금 다르게 보였거든요. 지금 저와 인사를 나누는 어르신들,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이 평범한 아침이,
사실은 언젠가 그리워질 한 시절의 한가운데라는 것.
그걸 알고 나니 인사 한 번이 예사롭지 않아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산바카라길에 마주친 어르신께 어느 때보다 크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참 좋죠?"
언젠가 사라질 것들 사이에서, 오늘 할 수 있는 인사를 미루지 않는 것. 쫄보인 제가 요즘 부리는 가장 큰 용기는,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