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편 4화] 제주도의 푸른 바다
아이가 입원한 병원의 6인실. 우리 아이 침대 바로 옆자리에는 한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아드님이 가끔 얼굴을 비추는 시간 말고는, 온종일 간병인 여사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시는 분이었다.
힐끗 스치듯 본 어르신의 외모와, 여러 커튼 너머로 들리는 증상으로 미루어, 깊은 병이 그분의 몸을 조용히 갉아먹고 있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면 간병인 여사님께 당신의 찬란했던 옛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어 놓으셨다.
젊은 시절 잘나가던 설계사로 일하며 일본으로, 미국으로 종횡무진 출장을 다니셨다는 화려한 일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운 고향 제주도 이야기.
“여사님, 제주도 진짜 맛집은 도민들만 가는 데가 따로 있어. 귤도 다 같은 귤이 아니야. 진짜 맛있는 종류는 말이지….”
고향 이야기를 하실 때만큼은, 목소리에 아스라한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생기도 잠시. 할아버지는 연신 배가 단단해지는 것 같다며 힘겨워하셨고, 얼굴빛은 하루가 다르게 짙은 노란빛으로 물들어 갔다.
며칠 동안 고된 검사들이 폭풍처럼 지나간 오늘 아침이었다. 회진을 돌던 의료진이 할아버지의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담담해서 더 아픈 말을 전했다.
“항암치료도, 약물도… 이제 병원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 주 안에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지 않으시면, 다음 주에는 비행기를 탈 체력조차 남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가 뒤를 이었다. 이 큰 병원이 이제 해줄 수 있는 일은, 호스피스 병동이 어떤 곳인지 안내해 드리는 것뿐이었다.
얇은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 모든 대화를 듣고 있자니,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옆에서 듣는 내 가슴이 이렇게 조여오는데, 당사자의 심정은 감히 어떨까.
의료진이 떠나고 정적이 내려앉은 병실. 할아버지가 깊은 숨을 한 번 내쉬셨다. 단순한 호흡이 아니었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날것 그대로의 깊은 탄식이었다. 그 한숨에 병실은 더 조용해졌다. 항암치료를 받으러 들어온 다른 분들도,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현대 의학으로 더는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내 몸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는 것을 누구보다 잘 느끼면서, 동시에 다가오는 끝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마음은, 대체 얼마만 한 무게일까.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맛있는 귤을 이야기하던 할아버지의 옆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기어이 비행기를 타고 고향 땅을 밟으실 수 있기를. 그곳에서, 조금은 덜 아픈 마지막 기억을 채우실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어본다.
문득, 어제 걸려온 이모의 전화가 떠올랐다. 26차 항암치료로 힘들어하시는 이모부가, 파킨슨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이모에게 자꾸 요양병원에 들어가라 하신다는 이야기. 그 말을 전하며 이모는 또 우셨다. 이제 더는 갈 곳이 없다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또다시,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처럼. 한 사람이 천천히 소멸해 가는 길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같은, 그 무거운 답답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래서일까.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즐겁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하나님은, 아이의 수술과 입원과 간병이라는 이 시간을, 바로 이것을 보여주시려고 내게 주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