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병원에서 만난 바카라들

빨간약을 바른 듯


학창 시절 성적표를 받는 마음으로 오늘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

피검사 결과에 따라 항암 주사도 못 맞고 터덜터덜 집으로 되돌아간 적도 있다.
남편이 암 진단을 받은 지 2년이 되어 간다.

낯설고 무섭기도 하고 내부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곳.

병원은 1 관부터 3관까지 있고 주로 우리는 1, 2관을 이용한다.

지하층도 주차장도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지상으로 올라오면 어디가 어딘지 헤맸었다.


진료 두 시간 전 2관에서 피를 뽑고 1관에 와서 체중과 혈압을 재고 기다린다.

진료 대기실의 무거운 공기.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 옆에 보호자들,

누구도 미소를 띠는 사람은 없다.


간병으로 버거워진 몸과 마음은 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남편 앞에서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지만, 혼자 있으면 암막 커튼을 친 것 마냥 마음이 무겁다.


진료 후 남편은 8층 항암주사실로,

난 2관 1층에 있는 원내약국으로 가서 약을 탄다.

다시 1관 8층에 올라가 약을 전달하고

남편이 항암을 시작하면 병원 밖 약국으로 간다.

어!

여기가 아닌가?

유명한 길치인 나는 1층과 지하 1층을 번갈아 오르내렸었다.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곧바로 목적지를 잘 찾고,

화장실 위치도 어느 곳이 덜 붐비는지도 안다.

누군가 길을 묻는다면 아주 잘 안내할 수 있다.

심지어 지름길도 안다.


병원이 너무나 익숙해진 상황이 한편으로는 서글픈 마음도 들던 바로 그때.

바카라이 쫘악! 깔려 있는 매대(진열대)를 만났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삭막한 마음에 잉크가 퍼지듯 한줄기 물방울이 퍼졌다.

예전에도 여기에 있었는데 눈으로만 보고 휙! 지나갔었다.

이번에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긴 걸까?

판매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1년에 세 번 1월 7월 10월에 나온다고 한다.


약국에 가다 말고, 시간을 아예 잊은 듯 이 바카라 저 바카라을 뒤적였다.

눈에 들어온 바카라들은

《마음의 속도를 늦춰라》

《 도망치고 싶을 때 읽는 바카라》

《 인생아 너무 애쓰지 말아요》

《 나는 뻔뻔하게 살기로 했다》

《 나에게 오늘을 선물합니다》

《 생각이 너무 많은 당신에게》

《 매일 괜찮은 척 살아가는 당신에게》

《 나는 죽을 때까지 나답게 살기로 했다》


바카라 1권을 사고 노란 비닐봉지를 흔들며 약국으로 가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그저 바카라들의 제목과 서문, 목차들만 읽었을 뿐인데

마음에 퍼져 있던 먹구름들이 물러갔다.


소설 속 세계에 빠진 순간만큼은 진통제를 삼킨 것처럼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어요.


소설 《바카라들의 부엌 》 속 글귀가 생각난다.

바카라은 내게 빨간약 같다.

쓰라린 현실 속에서 바카라 속의 문장들은 나를 살아가게 지켜주고 있다.

남편의 야위어가는 몸을 바라보는 일은 내 마음에 어찌할 수 없는 생채기로 남는다.

가만가만히 바카라장을 들출 때 바카라 속의 글자들은 나를 덧나지 않게 보호해 준다.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바카라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줘 고맙다.


매일 괜찮은 척 살아가는 나에게 작가는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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