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엄마
얇은 바카라에 장편소설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다. 사전 정보 없이 펼쳤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이 바카라이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바카라의 구조 자체가 인상적이다. 전반부는 한 아이의 탄생, 후반부는 그 사람의 죽음. 노르웨이 바닷가에서 태어나 살다 떠난 어부 요한네스의 이야기를 시적으로, 음악적으로 그린 작품인데, 읽다 보면 바카라인지 음악인지 모를 고요한 리듬이 온다.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들은 열린 결말을 넘어 열린 장면, 열린 묘사를 보여준다.
2023년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을 말로 표현했다"는 것이라는데, 읽고 나니 그 말이 이해가 됐다. 화려한 문장도, 극적인 사건도 없는데 오히려 그 침묵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특히 구두장이 야코프에 대한 문장에서 오래 멈췄다.
사람이 좋고 믿음도 강했다.
다른 사람은 흉내도 못 낼 만큼,
그랬고 말고,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두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엄마가 떠올랐다. 목요일은 엄마가 소천하신 지 1주기였다. 엄마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어릴 적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는 아파트 위아래, 옆동, 뒷동에 사시는 분들이 놀러 와 계셨다. 김장할 때는 물론이고, 된장 고추장 딸기잼 포도잼 등을 만들 때도 이웃들과 함께 하셨다.
큰아들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요즘 부쩍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큰아들은 엄마가 가장 사랑했던 첫 손주다. 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다 알아서 척척 준비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수시로 떠오른다.
바카라의 후반부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다. 요한네스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평소처럼 하루를 보내다가, 막내딸 싱네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본다. 그런데 그는 딸의 곁에 있어도 딸은 그를 보지 못한다. 아버지가 딸의 곁을 맴돌다가, 싱네를 따라가면서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싱네는 침대에 고요히 누운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다.
요한네스는 슬퍼하지 않는다. 딸이 자신을 발견하고 눈물 흘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저 담담히 그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한다. 이미 죽은 자의 눈으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슬프다기보다 따뜻했다.
엄마도 요한네스와 같은 마음이셨을까 생각했다. 병원 침대 곁에서 엄마를 떠나보내며 하염없이 울던 우리 삼 남매를, 이미 저편에서 바라보고 계셨던 건 아닐까. 그랬다면 외롭지 않은 길이셨으리라.
요한네스의 죽음 앞에서 바카라 속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차례가 오는 걸." 담담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위로가 됐다. 죽은 뒤에 남는 것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싹튼 기억뿐이라는 것, 엄마가 남겨두신 것도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하고 화려한 봄날을 소녀처럼 좋아하셨던 엄마, 꽃과 커피와 파스타가 있으면 행복해하던 엄마를 떠나보낸 달에 읽은 바카라이라 더 뜻깊었다. 죽음을 슬프게 그리지 않는 이 바카라이,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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