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너무 비장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요? '환승'이라는 주제가 온통 머릿속에 가득해서일까요? 황보름 작가님의 신작 '윗집 부부' 역시 '환승' 주제에 닿아 있었습니다. 70대 남성의 단단한 콘크리트 같던 생각의 전환이 첫 번째 환승,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와 새 삶을 꾸려 가는 윗집 부부 봄과 가을의 여정은 두 번째 환승입니다.
북토크에서 황보름 작가님은, 출간한 두 소설의 모든 캐릭터들이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윗집 부부'를 읽으면서, 인물들의 생각, 대화에서 마음에 남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재밌게 읽었지만 페이지가 쉬이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기억해 두고 싶은 부분이 많아서였습니다. 그중에서 두 부분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지금 가는 이 길을 더는 못 가게 되었을 땐, 다른 길을 찾게 되는 법이라고, 그 길이 성공적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럼에도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 방향을 정해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봄은 지난 1년 내내 되뇌었다. p116
수험생 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윗집 부부'의 아내 봄의 생각 부분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두려워할 때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그런 엄마 품에서 자랐는데 너네가 어떻게 잘못 클 수가 있겠어.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자식은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키우는 거야. 자식은 제 입에 밥 넣어준 사람, 필요할 때 옆에 있어준 사람, 절 사랑하는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마음을 줘. 애들은 다 사랑받은 경험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야. p274
주인공 경직이 아들에게 전화통화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경직이 말하는 '부모의 역할'이 너무나 공감되고, 자식을 키우는 엄마인 저 스스로에게 어떤 확신을 주는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서평은 여기까지이고, 딸들과의 에피소드를 풀어보겠습니다.
"늦으면 안 돼. 미리 가있어야 한다고. 엄마 다녀올게. 저녁 먹은 거, 식탁 좀 치워놔."
"엄마는 너무 비장해!"
사이사이 알록달록 인덱스를 붙인 바카라 두 권과 새바카라 한 권을 가방에 챙겨 넣고 서둘러 집을 나서는 길,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들려온 딸들의 말이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면,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신기하게 쳐다보는 딸들과 눈을 맞추고
"엄마가 그래? 내가 그런가."라고 했을 테다.
엄마는 다정해. 엄마는 재밌어. 엄마는 예민해. 엄마는 무서워. 엄마는 신기해, 이런 말들과는 사뭇 달랐다. '엄마는 비장해'는, 채소에 비유하면 호박, 당근, 상추, 깻잎에 섞인 고수처럼 이질적이었다.
세 딸들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은 다소 극성맞거나 과하게 긴장하고 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단, 편안하게 홈웨어를 입고 식사준비를 하거나 '나는 솔로'를 보며 빨래를 개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엄마가 외출하는 순간 한정이다. 그럼 나는 집을 벗어나는 순간 비장해지는 걸까?
최근의 굵직한 외출을 떠올리면 이랬다. 한 달에 한번 만나는 학부모 식사 모임, 두 번의 수시 박람회, 모 가수의 40주년 콘서트, 아이 관리형 독서실 상담 정도였다.
식사 모임에는 같은 동네 언니들과 내 차를 타고 시를 벗어나 30분 이상 이동했기에, '안전 운전'이라는 사명감으로 좀 더 긴장했었다. 편안한 사이이지만, 배려를 놓치거나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항상 신경 쓰는 편이다.
도 교육청에서 하는 수시 박람회를 다녀온 날에는, 각 학교 입학사정관들과 5분 남짓씩, 교육청 소속 컨설팅 담당자와 30분 상담하면서 매 순간 눈을 맞추고 열심히 메모를 했다. 정작 함께 간 수험생 당사자보다 엄마인 내가 더 열심이었던 것 인정한다. 다음 날 있었던 시 주최 수시 박람회에서는 전날 도 교육청 박람회에서 상담받지 못한 학교의 상담을 받고, 바카라자도 더 챙겨 왔다.
콘서트를 기다리며 일주일 정도 매일매일 그 가수의 노래를 들었던 것을 딸들도 알고 있었다. 식사 준비 동안 음식 냄새가 배니까 아침, 점심 두 번의 샤워를 하고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나섰다. 남편과 콘서트장에 도착하자마자 포토존에서 찍은 사진을 가족 단톡에 공유했고, 끝나고 나서는 세 시간 동안 40곡 정도를 불러주었다며 감탄사를 분수처럼 뿜어댔다. 그날 밤 좋아하는 배우의 드라마 첫 방송이라고 딸과의 산바카라도 마다하고 티브이 앞에서 대기했다. 평일에는 고3 딸이 방학 동안 공부할 관리형 독서실 상담에 큰딸도 동행하여 등록까지 마쳤다.
외출 전후와 동행한 시간 동안 지켜본 내 모습에서 아이들이 느낀 무언가는 '비장함'이었을까?
"엄마는 너무 비장해!"라는 말을 기어코 하게 된 어제는 베스트셀러 소설가 황보름 작가님의 북토크였다. 경쟁이 치열한 선착순 모집이기에 초 단위까지 알려 주는 인터넷 시계를 켜놓고 신청에 성공했다. 그런데 나는 작가님의 에세이 정도만 읽었었고, 정작 베스트셀러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와 신작 '윗집 부부'는 읽지도 않은 상태였다. 부랴부랴 집 앞 서점과 온라인에서 두 바카라을 사서 4일에 걸쳐 바카라을 다 읽고, 질문 시간이 되면 이런 질문을 해야겠다 생각도 하면서 북토크에 갔다. 집안일하는 틈틈이 식탁에서, 소파에서 벼락치기하듯 소설을 읽는 모습을 딸들도 봤을 테다.
한 가지 더. 공저 출간한 작가님들 단톡에 황보름 작가님의 북토크에서 기회가 생기면 우리 공저 '우리가 만난 환승역'을 선물하는 시도를 해보겠다고 했었다. 그분은 어나더 클래스의 분이시라 가능할까? 하는 분위기 때문에 내가 괜한 말을 꺼냈나 싶기도 했다.
북토크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황보름 작가님은 그동안 만난,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들 같기도, 이웃 동생 같기도 한 이미지에 소탈한 매력까지 갖추고 계셨다. 북토크 중에 슬롯자 조영주 작가님이 황보름 작가님께 "저랑 앤솔로지 함께 써보실래요?" 하셔서, 황보름 작가님도 앤솔로지 쓰신 분들이 궁금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조영주 작가님은 '얕고 넓은 관계'를 유지하며 글쓰기를 하는 것이 요즘의 문학 트렌드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나는 작가님의 '궁금하다' 한 마디의 실 끝을 부여잡고, 1대 1 사인회 시간에 용기를 냈다. 황보름 작가님께 조심스럽게 우리 바카라을 선물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가님이 흔쾌히 바카라을 받아주셨다며 단톡방에 자랑도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북토크에 오가는 내내 비장했던 게 맞았다.
큰 딸에게 물었다.
"엄마가 어떻게 비장해?"
"음... 엄마는... (딸은 활짝 웃으며) 엄마가 북토크하는 작가인 양 북토크에 가고, 상담받으러 가는데 상담해 주는 사람 같아. 콘서트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콘서트 하러 가는 사람 같아."
이 말을 듣고 박장대소,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너무나 정곡을 찔린 것 같아서.
'근데 그거 아니? 엄마가 가장 비장했을 때가 언제인 거 같아? 너희 사 남매를 낳아 집에 데려오는 그 순간이었어. 첫째인 너부터 막내까지 싸서 안고 온 연한 카키색 겉싸개를 엄마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란다.'
이 말을 해버리면 "이거 봐. 엄마는 너무 비장하잖아." 할까 봐, 속에서 꺼내지 않았다.
유연하게, 융통성 있게, 이것저것 잘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니까. 마치 전쟁터 나가는 장군처럼. 경연대회에 나가는 흑백요리사처럼.
사는 동안 "엄마는 너무 비장해!"라는 소리를 계속 들으며 매 순간 진심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