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되면 대부분의 친구들은 여행을 가거나 본국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이번 방학은 발리에 남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비자 때문이었다. 남편과 딸의 비자는 문제없이 나왔는데 내 비자만 계속 보류 상태였다. 필요한 서류는 모두 제출했는데 에이전시에서는 계속 서류가 부족하다고 했다. 분명 제출한 서류인데 없다고 하니 답답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클레임을 한 끝에 비자 만료 일주일 전에야 겨우 승인이 났다. 거기에 곧 이사까지 앞두고 있어 이번 방학은 자연스럽게 발리에서 보내게 되었다.
발리는 지금 건기다. 하늘은 맑고 습도도 낮아 일 년 중 가장 좋은 날씨가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놀러 오는 손님들도 유난히 많다. 발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아, 지금이 정말 좋은 계절이구나."를 새삼 느끼게 된다.
방학이 시작되자 집에는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심심한지 특별한 약속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단지형 주택에 살다 보니 또래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많고 같은 학교 친구들도 있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는 플레이데이트 날짜를 잡고 시간을 맞춰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예진 있어?" 하고 문만 두드리면 놀이가 시작된다. 어느새 우리 집은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어 버렸다.
방학 기간에는 발리 최대 명절인 갈룽안도 있었다. 길을 가다 보면 집집마다 장식이 세워지고 명절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그런데 내가 가장 놀라는 건 여전히 오토바이다. 어느 날은 분명 세 명이 탄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네 명이었다. 얼마 전에는 다섯 명이 탄 오토바이도 봤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제는 놀랍다기보다 감탄이 나온다. 저 정도면 운전이 아니라 묘기에 가깝다. 나는 아직도 오토바이가 무서워서 주로 그랩 택시를 이용한다. 에어컨도 나오고 덜 덥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다.
아침에 슈퍼마켓에 다녀오면 아이들이 뛰어온다. 문이 열려 있으면 자연스럽게 들어와 인사하고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생각해 보면 영어 과외를 따로 붙이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방법이다. 간식도 챙겨주고 음료도 주고 닌텐도도 열어주었더니 아이들이 매일 출근하듯 우리 집에 온다.
특히 닌텐도는 아이들을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버쿡(Overcooked)이라는 협동 요리 게임은 생각보다 영어 사용량이 엄청나다. 게임을 하다 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Bake it!", "Wash the dishes!", "Hurry up!" 같은 말을 쉴 새 없이 주고받는다. 서로 역할을 나누고 실수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 과정에서 영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영어 공부를 시키려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게임 하나만으로도 생활 영어가 끊임없이 오가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다.
루이지 맨션(Luigi's Mansion)은 또 다른 방식으로 영어를 사용하게 만든다. 단서를 찾고 퍼즐을 풀어야 해서 아이들끼리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해야 한다. "Open the closet.", "Break that.", "Try it again.", "Go over there." 같은 말들이 계속 오간다. 가끔은 둘이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무슨 큰일이 난 줄 알고 들어보면 유령 잡는 방법을 의논하고 있다. 게임을 하는 건지 회의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요즘 가장 자주 오는 아이는 옆집 러시아 남자아이다. 부모님이 바빠서 그런지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심심해 보였다. 그래서 수영장도 같이 가고 간식도 챙겨주고 게임도 함께 했다. 어느 날 농담처럼 "나 아들이 생겼네?"라고 했더니 아이가 무척 좋아했다. 원래도 자주 왔지만 그 이후로는 더 자주 놀러 온다.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인지 그런 말 한마디에도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 귀엽다.
사실 나도 이득이다. 예진이 혼자 데리고 수영장에 가면 결국 내가 같이 놀아줘야 한다. 그런데 친구가 함께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이들은 몇 시간이고 정신없이 물놀이를 하고 나는 선베드에 누워 휴대폰만 보면 된다. 맛있는 것까지 사주면 다섯 시간은 거뜬히 논다. 서로에게 좋은 조합이다.
사실 발리에 오기 전에는 영어 교육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영어 학원을 보내야 하나, 화상영어를 더 늘려야 하나, 어떤 교재를 써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가장 좋은 영어 선생님은 또래 친구들이었다. 함께 게임하고 수영하고 간식을 먹으며 하루 종일 영어로 떠드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혀간다. 교재에서는 배울 수 없는 표현들도 놀이 속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귀찮기보다는 반갑다. 오늘도 영어 과외 선생님들이 출근하셨구나 싶다. 간식값은 조금 들지만 학원비보다는 훨씬 싸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즐겁다. 방학이 끝나면 가장 아쉬워할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