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데이트
예진이는 지금 주 3회 집으로 오는 개인 과외를 정말 싫어한다. 선생님은 인도네시아인이지만 발리의 내셔널 플러스 학교에서 영어로 과학을 가르치는 현직 교사다. 처음에는 학교 숙제, 시험 준비까지 전부 맡겼지만 두 달 정도 지나 학교 시스템이 익숙해지자 영어만 집중적으로 부탁드렸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단순히 단어 외우기나 프리토킹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시제부터 시작해 문장 구조, 요약, 글쓰기까지 굉장히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특히 라이팅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다. 글을 읽고 주제를 찾고, 요약하고,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쓰게 만드는 수업이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 힘들다는 거다. 재미있는 게임도 없고, 수다도 없다. 한 시간 내내 머리를 써야 한다. 아이 입장에서는 당연히 싫을 수밖에 없다. 사실 나 역시 라이팅은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아이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말한다. “발리에서 이런 선생님 구하기 정말 힘들다”고. 원어민 선생님을 써도 프리토킹이나 수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의외로 라이팅을 체계적으로 잡아주는 선생님은 드물다고 한다. 특히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글쓰기를 잘 가르치는 건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재미있는 선생님은 아닐지 몰라도, 지금 예진이에게 필요한 걸 정확히 가르치는 ‘찐 선생님’이라는 거다.
그래서 고민이 된다. 아이는 힘들다고 하고, 엄마는 이걸 놓치면 안 될 것 같고.
반면 한국에서 1년째 이어오는 화상영어 선생님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필리핀 선생님인데 예진이와 코드가 너무 잘 맞는다. 둘이 만나면 정신없이 수다를 떤다. 안 맞는 화상영어 선생님은 여러 번 바꾸기도 한다는데, 예진이는 첫 선생님과 1년째 계속 가고 있다. 발음은 북미권보다 조금 아쉽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성격과 티칭 스킬은 정말 만족스럽다. 결국 영어는 한 방향만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한쪽에서는 즐겁게 말하고, 한쪽에서는 힘들게 써보는 과정이 같이 가야 하는 느낌이다.
최근 예진이는 학교 라이팅 시험에서 75점을 받았다며 자랑했다. 문법도 많이 틀리고 스펠링도 틀렸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 놀랐다.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서 끝까지 써냈다는 게 대단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던 아이가 영어로 자기 생각을 써 내려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과외 선생님께 보여드리니 선생님도 굉장히 뿌듯해하셨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랐던 순간.
예진이가 처음으로 플레이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같은 반 친구 메리안이었다. 학교에서 메리안 엄마가 내 연락처를 물어봐도 되냐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주말에 키즈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들어가자마자 다섯 시간 동안 둘이 노느라 아이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영어로 떠들고 웃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신기했다.
거기서 또 한 번 놀랐다. 식사 주문을 하려고 메뉴판을 보는데 예진이가 영어 메뉴를 읽으면서 스파게티를 시켜달라고 하는 거다.
“영어를 읽네…?”
사실 이런 순간들이 부모를 가장 놀라게 한다. 시험 점수보다도, 학원 레벨보다도,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영어를 생활 속에서 ‘읽어버리는’ 순간.
메리안 엄마는 자카르타에서 국제학교를 나온 분이라 영어가 정말 자연스러웠다. 나는 전날부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긴장해서 잠도 깊게 못 잤다. 솔직하게 영어를 잘 못한다고 말하고 손짓발짓으로 대화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학교 이야기, 담임 이야기, 인도네시아 생활 팁까지 정신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메리안 엄마가 예진이가 한국에서 온 지 10개월밖에 안 됐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원래 영어를 공부하고 온 아이 같아요.”
웃으면서 학교에서 특훈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생존영어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뭉클했다.
메리안은 영어 유치원부터 계속 영어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 영어로 생활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면 예진이는 한국에서 갑자기 한 달 만에 인도네시아로 오게 됐다.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적응이 더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10개월이 지난 지금, 예진이가 말했다.
“엄마, 오늘은 내가 진짜 읽고 문제를 풀었어.”
지금까지는 단어 몇 개로 유추해서 문제를 풀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고 이해해서 답을 적었다는 거다.
영어를 읽었다는 말이었다.
사실 지난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낭독도 하고 묵독도 했다. 하루 30분 정도씩 브릭스를 읽었다. 읽으면서도 늘 궁금했다. 도대체 언제 영어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까. 언제쯤 안 무서워질까.
그런데 지금 보니 어느 순간부터 예진이 눈에 영어가 ‘글자’가 아니라 ‘의미’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여전히 모르는 단어도 많고 라이팅은 힘들어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영어를 피하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읽으려고 하고 있다는 거다.
10개월 동안 아이도 참 많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