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트라이얼데이, 영어보충반레벨테스트

by제시카

딸은 참여 욕구가 정말 강한 아이다. 리더 성향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일까,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펑펑 울었다. 수업이 끝난 뒤 1시간 동안 그룹끼리 모여 숙제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같은 조 아이들은 인도네시아인이거나 하프였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인도네시아어로 이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조차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했다고 했다. 예진이는 영어로 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아이들은 무시했고, 참여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결국 화가 나버렸다. 종교 시간이나 다른 과목에서도 영어보다 인도네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 학교에 대한 마음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아이는 너무 속상해했고 남편은 당장 학교에 항의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학교에서 굳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한국처럼 클레임을 하면 개선되는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싫으면 나가라”는 분위기에 더 가까웠다. 이미 많은 학부모들이 영어 환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바뀌지 않았고, 결국 다들 다른 학교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들은 상태였다. 아이가 이 학교에서 적응도 잘하고 나름 즐겁게 지냈지만, “인도네시아어만 쓰는 학교”라는 인식이 생기는 순간 정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1학기만 마치고 빠르게 전학을 결정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두 번째 국제학교 입학 테스트는 발리에 온 지 6개월 차에 진행했다. 그때는 아이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걸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저 ‘지금이라도 빨리 옮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테스트를 보러 갔다. 시험은 영어, 수학, 과학, 리딩으로 진행됐고 인터뷰도 없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 뒤, 학교에서 온 메일에는 “Year 4로 입학을 허용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 학년을 낮춰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입학 테스트는 생년월일 기준 배정을 위한 단순 확인용이라고 해놓고 결과적으로는 학년을 낮추라는 제안이라니. 더구나 초등은 대부분 제 학년에 넣어준다고 알고 있었기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바로 다시 메일을 보냈다. 한국 복귀 후 학업 연결성까지 설명하면서, “If she can enter her correct grade, we are fully willing to follow the school’s support system. Even if her English is not enough, she will attend EAL classes.”라고 분명히 밝혔다. 솔직히 말하면,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학교에서는 EAL 테스트와 Trial Day를 제안했고, 2달 뒤로 일정이 잡혔다. 그 사이 나는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됐다. 리딩이 문제였구나. 그때부터 리딩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테스트 당일. 약 20분 정도 EAL 테스트를 보고 예진이는 바로 5학년 수업에 들어갔다. 나는 사무실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그리고 들은 말은 예상 밖이었다. “Yejin does not require additional English support. She can join the regular Year 5 class.”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오후 3시, 수업이 끝난 뒤 담임 선생님과 짧게 면담을 했다. 첫인상은 카리스마 있고 강단 있는 스타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정말 많이 달라지는데, 이 선생님은 아이를 끌어올릴 수 있는 타입 같았다. 나는 여기가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규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첫날이라 많이 긴장했을 것 같다. 말도 잘 못했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더니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She was quite talkative.”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Quick learner, and a good listener.” 수업도 잘 따라왔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했다. 나는 혹시 낯설어서 shy했을까 걱정했는데 “Not at all.”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결론은 명확했다. EAL 수업은 필요 없고, 대신 “Her reading is slightly weak. Please have her read at least 30 minutes every day.”라는 조언이 남았다. 그렇게 예진이는 5학년으로 입학하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우긴 부분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집에 와서 테스트가 어땠는지 물어봤다. 창문을 열고 닫아보라는 지시를 하고, 일어서고 앉으라는 기본적인 명령을 따르게 한 뒤 글을 읽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Where are you from?”, “What season do you like?” 같은 질문들이 이어졌는데, 예진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질문에 답만 하는 게 아니라 “What about you?”, “What do you think?” 하며 계속 되묻고 대화를 이어갔다고 한다. 시험인데 갑자기 스몰토크가 시작된 셈이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테스트를 진행해야 하는데 계속 질문이 돌아오니 조금 당황한 기색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왜 EAL이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는지 이해가 됐다. 말 그대로 ‘대화지옥’. 선생님, 정말 수고 많으셨다.

이 학교를 처음부터 고려했지만 호주계 학교라는 이유로 혹시 인종차별로 상처받지 않을까 괜히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아이를 너무 온실 속에서 키우려고 했던 건 아닐까. 상처를 받을 상황 자체를 미리 차단하는 게 정말 아이를 위한 걸까. 어차피 지금 학교에서도 놀림은 있었다. “Your eyes are small.”, “You’re not pretty.” 아이들은 어디서든 그런 말을 한다. 중요한 건 그걸 피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이제는 부딪쳐보고 스스로 헤쳐 나갈 힘을 키우는 것 아닐까.

예진이는 이제 말할 수 있다. “That’s rude.”, “How dare you?”

점심시간에는 옆집 남자아이 Alton을 보고 먼저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걸 본 여자아이들이 “How do you know Alton?”이라고 물었고, 예진이가 “He’s my neighbor.”라고 답하자 아이들이 웃으면서 말했다. “All boys here are crazy. Don’t talk to them.” 예상치 못한 꿀팁(?)까지 얻고 온 하루였다.


그래도 처음 선택했던 학교가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는 한국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고, 영어가 부족해도 친구들이 기다려주고 이해해 줬다. 대부분 아이들이 세컨드 랭귀지였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거 같았다.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국제학교에 들어와 영어를 시작한 아이에게는 오히려 그런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영어를 못해서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영어가 낯설지 않게 되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가격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이전 학교가 꽤 괜찮은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아무 준비 없이 해외로 나오면 첫 1년은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아이들은 학교에 앉아 있지만 사실은 수업 내용을 완벽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무슨 상황이지?”를 파악하는 데 에너지를 다 쓴다.

특히 초등 고학년은 더 그렇다. 수업은 이미 영어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영어로 배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부족하면 단순히 영어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수학도, 과학도, 슬롯도 함께 어려워진다.

그래서 유학을 계획적으로 준비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미리 준비하고 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정말 아무 준비 없이 와서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방법도 있지만, 시간이 있고 선택할 수 있다면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를 조금이라도 해두는 편이 훨씬 좋다.

특히 초등 고학년이라면 더 그렇다. 말이 조금 통하고, 글을 읽는 데 거부감이 덜하고, 자기 생각을 간단히라도 표현할 수 있다면 학교 적응 속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여기 와서 가장 크게 느끼는 건, 한국처럼 촘촘한 사교육 시스템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학원도 많지 않고, 괜찮은 선생님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집에서 부모가 얼마나 방향을 잡아주느냐가 정말 중요해진다.

한국에서는 학원이 해주던 일을 여기서는 결국 엄마가 하게 된다.

수학도, 과학도, 슬롯도, 영어도.

가끔은 내가 전 과목 개인 과외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문득 한국의 학원이 참 그립다.

돌아보면 첫 학교는 적응을 위한 학교였고, 두 번째 학교는 성장하기 위한 학교가 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8개월- 말은 늘었는데 글을 안 읽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