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말은 늘었는데 글을 안 읽던 이유

국제학교 8개월차

by제시카

국제학교는 생각보다 방학이 길다. 중간 방학만 해도 거의 3주를 쉰다. 학교 달력을 보며 계산해보니 1년 동안 학교에 가는 날이 180일도 되지 않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365일 중 절반 이상을 학교에 가지 않는다. 결국 남은 시간을 집에서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아이의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영어 영상 노출이다. 엄마표 영어를 보면 영어바카라과 영어 영상을 많이 보여주라고 하지만, 예진이는 아직 영어바카라을 읽지 못하고 한국어가 훨씬 편하다. 유튜브나 영상도 대부분 한국어로 된 것만 본다. 영어로 틀어주면 표정이 바로 굳어진다. 해외에 와서 적응 중인 상황에서 굳이 스트레스까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좋아하는 한국 영상을 마음껏 보게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시키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노출시키면 어떨까. 그래서 영화관에 갔다. 팝콘을 사주고 하루 신나게 놀다 오는 느낌으로 애니메이션을 보게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이 나오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이가 영어 대사를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이 문장이 제일 좋았어.” 그 순간 영어는 더 이상 공부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영어 영상 노출을 시작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영화로 시작해서 주말마다 한 편씩 보여주고 있다. 영어 자막에 영어 음성으로 보는데도 생각보다 집중해서 잘 본다. 영어가 들리는 것도 이제는 훨씬 편해진 것 같다. 학교가 끝나면 다시 한국어 환경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영어 노출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영어권 아이들보다 속도가 느린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들려주고 싶었다.

이 방법이 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억지로 시키는 영어보다 아이 스스로 좋아하게 되는 영어가 훨씬 오래 간다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시작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짧은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간 예진이는 그동안 한국어만 쓰며 편하게 지냈다. 그래서 솔직히 불안했다. 영어를 다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학교에 돌아간 예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영어 모드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내 마음만 불안했던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로 전학 온 남학생이 예진이를 보며 눈을 손으로 크게 벌리는 행동을 했다. 예진이는 바로 선생님께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이런 행동에 매우 민감하셨고 그 학생은 크게 혼이 났다. 영어가 아직 서툰 그 학생에게 영어를 잘하는 러시아 친구가 강하게 이야기해주었고, 결국 그 학생은 예진이에게 사과를 했다.

예전 같았으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 와서 나에게 이야기했을 텐데, 이제는 스스로 판단하고 직접 해결하고 돌아온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대견했다. 국제학교는 학부모가 대신 해결해주는 구조라기보다, 아이가 먼저 문제를 이야기하고 해결하는 구조에 가깝다. 한국과는 조금 다른 문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다른 방식의 성장이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바카라을 읽어 볼 친구를 묻자 예진이가 손을 들고 읽었다고 한다. 몇몇 단어의 발음이 조금 틀려 옆에 있던 친구가 큭큭 웃었지만, 예진이는 개의치 않고 끝까지 읽었다고 했다. “틀릴 수도 있지. 나는 배우는 중이니까.” 그 말이 참 인상 깊었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틀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음 수업으로 이동해서는 친구와 자리를 정해야 했는데, 예전에는 “나 네 옆에 앉아도 돼?”라고, “Can I sit next to you?”라고 물어보던 아이가 요즘은 “너 내 옆에 앉고 싶어?”라고, “Do you want to sit next to me?”라고 말한다고 한다. 같은 상황이지만 조금은 다른 뉘앙스의 질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이게 미묘한 차이지만 자존심의 문제라며 웃는다. 8개월차, 영어 실력보다 먼저 아이의 태도와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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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교에 다닌 지 8개월 차. 예진이는 친구들과의 대화도 자연스러워졌고, 듣고 말하기는 확실히 많이 늘었다. 그런데 세 번의 시험을 치르면서 이상한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중간고사와 옮길 국제학교 시험을 보며 느낀 건 하나였다. 아이는 듣고 말하기는 늘었는데, 왜 글을 안 읽을까?



온라인 시험을 옆에서 지켜보는데 문제를 읽지 않고 그냥 클릭, 클릭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새로운 학교 입학시험도 비슷했을 것 같다. 처음에는 단어를 몰라서 그런가 싶었다. 그래서 단어 공부를 시켜야 하나 고민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9개월 차에 너무 빠른 걱정인가?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읽게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국제학교 고학년으로 갈수록 수업은 달라진다. 글을 읽고,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쓰는 활동이 많아진다. 아이에게 빨리 읽어야 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티는 내지 못했다. 대신 조용히 브릭스 250 교재로 하루 10분 정도 낭독을 시키고 간단히 문제도 풀어봤다.


그러다 어느 날, 소리 내지 말고 눈으로만 읽어볼래? 하고 묵독을 시켜봤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집중을 못 하고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지? 소리 내서 읽을 때는 이해를 하는데 묵독은 왜 안 되는 걸까. 결국 다시 낭독으로 돌아갔다. 한 달이 더 지났다. 나는 또 조급해졌다. 물론 이번에도 티는 내지 않았다. 조급함은 늘 내 몫이었다. 학교 시험도, 국제학교 입학 테스트도 결국은 읽고 푸는 시험이었다. 모든 평가는 리딩으로 결정된다는 걸 점점 더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SNS를 보면 엄마표 영어를 한 아이들은 영어 원서를 너무 자연스럽게 읽는다. 듣기와 스피킹도 아직 완벽하지 않은데 두꺼운 바카라을 묵독으로 읽는다. 이게 가능한 건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언어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순서로 배운다고 알고 있었는데 화면 속 아이들은 그 순서를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다.


두 달 정도 낭독을 하면서 아이가 읽는 것 자체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realize라는 단어를 읽다가 아, 이게 리얼라이즈구나 하고 스스로 연결하는 모습. 그걸 보면서 느꼈다. 아, 이제 글자와 소리가 연결되고 있구나. 눈으로 본 글자가 머릿속 소리로 이어지는 순간이구나. 그럼 그때는 왜 실패했을까. 아마도 소리와 글자가 아직 연결되기 전에 눈으로만 읽으라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즈 트레이닝 해볼까? 눈으로만 글을 읽는 연습이야. 왜 해야 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옮길 학교에서 연습해 오라고 했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긴 거짓말이다. 그럼 한 문단씩 천천히 해보자. 많이 안 해도 돼. 그렇게 시작한 지 10일쯤 지나자 읽는 속도가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 내지 말라고 해도 입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소리를 내서 읽어봐라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입속 소리가 사라지고 눈으로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한글도 자연스럽게 읽게 되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조급했을까. 굳이 연습해 오라고 했다는 말까지 하면서 묵독을 시켜야 했을까. 결국 모든 평가는 글을 읽고 푸는 방식이기에 지금은 모르는 단어 2~3개 정도만 물어보고 끝까지 쭉 읽어간다. 아직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예전에는 묵독을 시키면 글이 이해가 안 돼라고 했던 아이가 지금은 글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


묵독은 갑자기 되는 게 아니라, 낭독을 통해 글자와 소리가 연결된 뒤에야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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