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의 총합은 비슷하다

인생 총량의 법칙

by이곰

식물을 키우다 보면 각각의 식물이 빛나는 시기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릴 때 맡았던 치자꽃 향기가 좋아서 올해 처음으로 치자나무를 샀다. 5월쯤이었나, 굵직한 꽃봉오리가 네다섯 개 달리고 그 아래로 작은 봉오리들이 오밀조밀 맺힌 나무였다.


작은 체구에 비해 기특하게 꽃을 많이 피워 한두 달 나를 기쁘게 했는데 그 이후로는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가 되었다. 내년 5월이 되면 또 꽃을 피울 거라는 걸 알지만, 화려한 두세 달을 빼고 나면 남는 건 그냥 초록 잎사귀 많은 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근 나의 눈길을 잡고 있는 건 '블루버드'라 불리는 비단향나무다. 온라인에서 본 신비로운 은색 잎에 반해 구매했는데 막상 집에 도착한 나무는 너무 볼품이 없었다. 사진 속 그 신비한 빛을 가지고 있던 잎은 바짝 마른 갈색잎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이게 내가 본 그 나무가 맞나' 실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리 집에 찾아온 식물이니 분갈이를 해주고, 서툰 솜씨로 지저분한 잎들을 쳐냈다. 하지만 기대치가 떨어진 상태라 오랜 시간 동안 내 눈길을 받지 못한 채 구석에 있었다.


그런데 한두 달 전쯤인가, 불 꺼진 방에서 문득 베란다 쪽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이 친구가 언제 이런 모습이 되었지?'


바깥 불빛과 겹쳐진 잎사귀가 야광빛처럼 오묘한 은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볼품없던 갈색빛 실 가닥 같던 잎들이 언제 저렇게 건강하게 살아났는지. 그 순간 생각했다.


‘이걸 그때 못생겼다고 내다 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퇴직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전직 회사 동료들을 만나는데 그들이 전해주는 회사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의 총합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다 정년퇴직하자마자 갑작스러운 치매를 얻었고, 원인 모를 병마에 쓰러진 이도 있었다. 무리한 투자로 재산을 날리거나,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좋은 학벌에 입사해 원하는 대로 승진하고 부서를 옮기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A는 이제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 온라인 게임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 설상가상 가족들도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늘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여겼던 B는 꾸준히 글을 써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더니, "이제 내 글로 승부하겠다"며 홀연히 사직서를 던졌다.


오십을 넘겨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내 인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할 때는 '과연 내 인생에 해가 뜨는 날이 오긴 할까' 절망했다.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깜깜한 시간들이 어느 정도 지나가니 거짓말처럼 약간의 행운과 우연이 겹치며 해가 드는 양지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처음엔 어리둥절했고,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살면서 따뜻한 볕을 쬐어볼 수 있을 거라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남들이 보기엔 평온하게 사는 이들의 삶엔 마냥 햇살만 가득할 것 같다. 단란한 가족, 풍족한 살림살이.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어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혼자 사는 삶은 어떤가. 어디가 아파 치료를 받아야 할 때,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 앞에 앉아 내 증상을 설명하고 의사의 검진 결과를 듣고 어떤 시술을 받고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 선택하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다.


하지만 4인 가구의 가장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역시 나름의 거대한 무게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만 바라보는 가족들, 늙어가는 부모, 그리고 거울 속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보며 "언제까지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공포와 막막함을 느낀다고 했다.


'인생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겪는 기쁨과 슬픔, 고생과 행운의 총량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비슷하다는 이야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사람이 떨어진 때는 올라갈 때 느꼈던 속도와 높이와 비례하게 바닥으로 곧두박질 치고, 내 인생에는 추락할 일만 남았겠지 했는데 어느 순간 따뜻한 햇살 아래에 마음 편히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어설픈 위로나 희망고문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 회자되는 옛말은 나름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볼품없던 블루버드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야광빛 은색을 근사하게 품어내듯, 우리의 볕 들 날도 각자의 계절에 맞춰 조용히 익어가며 과실을 거둘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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