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
『일리아스』를 처음 펼쳤을 때, 나는 영웅을 만나러 갔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헥토르의 용기,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장대한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 마음에 남은 것은 영웅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적과 함께 흘린 눈물
『일리아스』 제24권. 늙은 왕 프리아모스는 적장 아킬레우스의 천막으로 찾아간다.
왕의 권위도, 아버지의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를 건넨다.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해 주시오."
그 한마디에 아킬레우스는 무너진다. 자신의 늙은 아버지를 떠올리고, 먼저 떠난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며 적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 전쟁은 잠시 멈춘다. 승자도 패자도 사라진다. 남은 것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뿐이었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오래도록 바카라을 덮지 못했다.
22권에서 아킬레우스는 분노에 사로잡혀 헥토르의 시신마저 모욕했다.
23권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금씩 슬픔을 받아들인다.
24권에 이르러 마침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나는 그 변화야말로 『일리아스』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생각했다.
칼을 들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일리아스』를 읽으며 내 마음에 오래 남은 사람들은 언제나 여인들이었다.
안드로마케의 기다림
헤카베의 눈물
브리세이스와 크리세이스의 침묵
카산드라의 외로운 예언
헬레네의 뒤늦은 회한
테아노의 기도와 이리스의 말
그들은 칼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어떤 영웅의 함성보다 더 오래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내 세 번째 스무 살이 『일리아스』를 만난 이유....
예순이 넘어 방송대에서 『일리아스』를 읽으며, 나는 단순히 과제를 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다시 읽고 있었다.
젊은 날에는 누가 이겼는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끝까지 사람으로 남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사람의 눈물을 이해하는 마음만큼은 더 깊어지게 했다. 그래서 삼천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의 내 삶과 조용히 이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베드로전서 4장 8절]
사랑은 전쟁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람을 다시 사람답게 만든다.
아킬레우스는 적을 쓰러뜨렸을 때보다 프리아모스와 함께 울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 그것이 호메로스가 삼천 년을 건너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유일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일리아스』를 덮으며 나는 영웅을 기억하지 않았다. 끝까지 사랑했던 사람, 기다렸던 사람, 기도했던 사람, 그리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을 기억했다.
삼천 년 동안 이 바카라이 살아남은 이유 역시 전쟁을 기록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끝내 사람다움을 잃지 않으려 했던 인간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순이 넘어 다시 학생이 된 나는 『일리아스』를 통해 영웅이 아닌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 자신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마 그것이, 내 ‘세 번째 스무 살’이 『일리아스』를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