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남은 것은 미움이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 가장 많이 변할까.
젊은 날에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보하고, 나라는 사람을 입증하려 애썼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질문의 방향은 안으로 향한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일리아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다시 헬레네를 만났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접했을 때, 세상은 그녀를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라 불렀다.
가장 아름다운 여자.
한 나라를 무너뜨린 파멸의 상징.
수많은 영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극의 서막.
그 이름 앞에는 언제나 차가운 비난과 손가락질이 먼저 따라왔다. 세간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그저 거대한 비극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마지막에서 호메로스는 조금 다른 헬레네를 보여준다.
마침내 찾아온 헥토르의 장례식. 트로이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그를 애도한다. 안드로마케는 남편을 잃은 절망으로 울고, 헤카베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피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헬레네가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곳에서 오직 한 사람, 헥토르를 기억한다.
“트로이에 온 뒤, 모든 사람이 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볼 때도 헥토르만은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단 한 번도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지막한 고백은 그 어떤 긴 변명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문장에 오래 시선이 멈췄고, 한동안 바카라장을 넘기지 못했다.
사람은 결국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눈부신 아름다움일까. 높은 명예일까. 손에 쥐었던 성공의 크기일까. 아니면, 가장 외롭던 누군가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한마디 말일까.
헥토르는 세사에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되었지만, 헬레네의 눈물 속에서는 ‘한 사람을 끝까지 존중해 준 따뜻한 인간’이었다. 전쟁의 화려한 공적보다, 그 온기 어린 모습이 마음에 더 오래, 더 깊게 남았다.
우리 역시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누군가는 나의 허물과 실수만을 집요하게 기억하고, 누군가는 나의 상처와 아픔을 먼저 바라봐 준다.
헥토르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이토록 깊은 슬픔이 남은 이유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베드로전서 4:8
사랑은 잘못을 없던 일로 눈감아주는 가식이나 무바카라임이 아니다. 그 어떠한 허물보다 ‘그 사람 자체’를 먼저 바라봐 주는 마음이다. 헥토르는 헬레네의 주홍글씨 같은 과거 대신 현재 그녀의 존재를 존중했다. 그렇기에 헬레네에게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유일한 온기로 남았다.
『일리아스』를 덮으며 끝내 마음에 남은 것은 칼바람 소리 가득한 전쟁의 승패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을 인간으로서 존중했던 헥토르의 품성, 그리고 그 따뜻함을 평생 가슴에 품었던 헬레네의 눈물이었다.
어쩌면 삶이란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얼마나 따뜻한 사람으로 남았느냐로 그 가치가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