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손으로 잇지 않는 인연은 우연이 된다
바카라장을 정리하다 낡고 작은 수첩 같은 것 하나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대학 시절에 열심이었던 서클 주소록이었다. 표지에 적힌 연도를 보고 손가락으로 잠깐 계산을 해봤다. 삼십 년이 넘었다.
펼치니 이름들이 빼곡했다. 지금은 사라진 국번. 핸드폰이 아닌 집 전화번호들. 군번처럼 또박또박 적힌 기수와 이름과 소속 대학들. 써클 행사에 즈음해서는 이 수첩을 들고 공중전화 앞에 서서 동전이 떨어질 때까지 전화를 돌리던 기억이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름 뒤로 얼굴이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이상한 확신이 하나 들었다. 이 안에 내가 전화 한 번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참 열심히도 연락하면서 살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손으로 짚어가며 세어보니, 지금도 띄엄띄엄이나마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었다.
요즘 주위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나이 들면 어차피 남는 사람은 몇 안 된다고. 그러니 자꾸 넓히려 하지 말고, 있는 인연을 잘 가꾸라고.
술자리에서든 골프장에서든 이 말은 늘 결론처럼 나오고,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끄덕였다. 나는 인복이 있는 편이었고,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젊어서는 그 많은 인연을 챙기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누가 이사를 하면 알았고, 누가 시험에 붙으면 그날 저녁에 소식을 들었다. 축하파티는 몰라도 상가에는 빠진 적이 없다. 지금은 다르다. 일 년에 전화 한 통 못 하는 이름이 수첩 한 권이다. 그래도 사는 데 지장은 없다.
그런데,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옥스퍼드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사람의 관계에 층이 있다고 했다. 가장 안쪽에 다섯 명, 그 바깥에 열다섯 명, 다시 오십 명, 그리고 백오십 명. 안쪽 다섯 명은 매주, 열다섯 명은 매달, 바깥층은 일 년에 한 번쯤 소식을 주고받아야 그 자리가 유지된다고 한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여섯 달 동안 연락이 끊기면, 서로가 느끼는 친밀도는 그냥 아는 사람 수준으로 내려앉는다고 한다.
관계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소모된다는 뜻이다.
요즘은 연락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전화 번호는 팬드폰에 저장되고, 단톡방은 몇 년째 그대로 남아 있다. 명단이 남아 있으니 관계도 남아 있다고 여기기 쉽다. 수첩은 그 착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종이 위의 이름은 내가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그냥 글자였다.
내게 남은 열 명은 우연한 숫자가 아니었다. 던바가 그려놓은 층 안에 정확히 들어가 있었다. 조금 무안했다. 나는 내가 사람에게 성실한 편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좁아진 관계는 게으름의 결과일까. 스탠퍼드의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은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나이가 아니라 '남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시간이 넉넉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사람을 좇아 명함을 모으고, 모임에 나가고, 아는 사람의 수를 늘린다. 그러다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기준이 바뀐다. 지식보다 감정을, 넓이보다 깊이를 택한다. 카스텐슨은 이것을 노화에 따른 쇠퇴가 아니라 동기의 전환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나이가 들면 관계망은 좁아지지만 감정의 질은 오히려 나아진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잠깐 안심했다. 나는 게을러진 것이 아니라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날에 적어진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택적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어쩔 수 없이 좁아진다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좁아진다.
남은 열 명은 어떻게 남았을까. 생각해 보면 저절로 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명절에 안부를 묻고, 부고를 주고 받고, 별것 아닌 기사를 링크로 보내는 일. 그 사소한 손짓들이 삼십 년을 버텼다.
어쩌면 새로운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는 노후의 잠언은 절반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혜인지 나이듦의 증거인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다. 다만 순서가 틀렸다는 것은 알겠다. 넓히지 않기로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남기기로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날, 수첩에만 있고 나에게서는 지워진 한 이름을 골랐다. 연락하는 열 명을 통해 소식은 듣고 있지만, 직접 연락한 지는 이십년이 넘은 서클 일 년 선배였다. 내가 아는 그 열 명에게 수소문하여 이 선배의 핸드폰 번호를 구했다. 그것도 나름 성의가 필요했지만, 이십년을 메꿀 노력이라 생각하니 어렵지 않았다.
언제나 마음 편하게 걸던 전화였는데, 이젠 심호흡이 한 번 필요했다. 신호가 갔다. 아무도 받지 않기를 반쯤 기대했던 것 같다. 세 번째 신호에서 누군가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십 년이 한 칸으로 접혔다.
"형, 저 광훈이입니다."
잠깐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웃음 섞인 목소리가 건너왔다.
"야, 살아 있었네."
살아 있었다. 그 사람도 나도 이십 년 동안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 있었다. 다만 아무도 먼저 손을 뻗지 않았을 뿐이다.
인연은, 사람의 손으로 잇지 않으면 결국 우연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