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핑계로 닫아둔 바카라장 앞에서
인터넷에서 바카라을 사는 클릭 수는 줄지 않았는데, 바카라을 펴는 일이 부쩍 줄었다. 예전에는 취미란에 "독서"라고 자신있게 쓸 수 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바카라 구매" 라고 취미를 바꾸어야 할 판이다. 한때는 가방에 늘 바카라 한 권이 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자리가 비어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
핑계는 분명하다. 눈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글씨가 작은 바카라은 사 놓고도 아예 바카라장을 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나마 글자가 큰 바카라도 침침한 눈을 핑계 삼아 몇 달씩 덮어두기 일쑤다.
노안 탓이니 나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자위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먼저 낡는 법이라고, 무릎이 시큰거리고 눈이 침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사람은 정말 몸부터 늙는 걸까. 얼마 전 어떤 글을 읽다가, 나는 한참을 멈춰 고민해야 했다.
그 글은 이렇게 말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조용히 찾아온다고 했다.
마음이 늙기 시작하면 새로운 일을 피하게 되고 예전 같으면 한번 해보자 싶던 일도 이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게 된다고 했다. 실패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냥 번거롭고, 귀찮고, 지금이 편해서 접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중해진 줄 알았겠지만, 사실은 도전하는 마음이 줄어든 것이라 했다.
내 눈 핑계가 꼭 그랬다. 정말 글씨가 안 보여서가 아니라, 바카라을 펴고 집중하는 일이 번거로워졌던 것이다. 돋보기 하나 사면 될 일을, 나는 사지 않았다. 아마도 사러 가는 일조차 귀찮았기 때문일테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나이를 핑계 삼았다. 몸의 문제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먼저 손을 놓고 있었다.
마음이 늙는 사람은 기대를 멈춘다고 했다.
그럴 것 같다.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대도, 앞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도 줄어든다. 그러면 하루하루가 비슷해진다. 설렘이 빠져나간 자리를 익숙함이 채우고, 익숙함이 길어질수록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입버릇처럼 말하게 된다. 이제 다 해봤어. 세상 다 똑같아. 사람은 안 변해. 이런 말이 늘어날수록 마음은 점점 굳는다. 경험이 쌓였다는 핑계로, 남은 가능성을 하나씩 닫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움직이는 힘 가운데 하나로 호기심을 꼽았다. 앞으로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살아 있어도 활력을 잃는다고 했다. 결국 마음을 젊게 하는 건 나이가 아니라 관심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든이 넘어서도 젊어 보인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새로운 걸 배우고, 처음 가보는 곳에 발을 들이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에 관심을 둔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아직 젊은데도 모든 게 귀찮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몸의 나이와 마음의 나이는 전혀 다르다. 마음이 늙으면 몸도 늙는다. 몸이 젊어지려면 마음을 젊게 해야 한다.
마음이 늙는 또 다른 순간은 자신을 놓아버릴 때라고 했다.
옷차림에 무심해지고, 건강도 대충 챙기고, 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낸다. 이 나이에 뭘, 하는 말이 늘수록 활력도 함께 빠져나간다. 나이를 먹은 게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가능성을 접어버리고 그 결과로 자신까지 놓아 버리는 것이 문제다.
다행히 마음을 젊게 두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작은 변화 하나면 된다. 가보지 않은 길로 산바카라해 보는 것, 한 번도 펴지 않았던 바카라을 들춰보는 것, 오래 연락하지 못한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것. 이런 사소한 행동이 굳어가던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나는 바카라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두고 펴지 못한 바카라들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글씨가 안 보여서가 아니라, 마음이 그 바카라들에서 먼저 돌아서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래서 돋보기를 하나 샀다.
거창한 결심은 아니다. 다만 눈을 핑계로 닫아두었던 한 칸을, 다시 열어보려는 것이다. 사람은 몸이 늙어서 늙는 게 아니라니 말이다. 궁금한 것이 남아 있고, 오늘도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다면,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젊게 살아갈 수 있다. 작은 돋보기 하나가, 어쩌면 그 계기가 되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