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외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즈음하여

by신광훈

예전에는 커피 한잔이나 맥주 한잔을 앞에 두고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생각을 했다. 볼펜을 들고 떠오르는 것을 종이에 끄적였다. 흩어진 메모를 이리저리 옮기며 생각의 모양을 잡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과정 자체가 쉼이었다. 머리를 식히는 일과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한자리에서 같이 일어났다.


지금은 그 자리에 AI가 들어와 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린다. 답은 빠르고 깔끔하다. 종이 위에서 헤매던 시간이 사라졌다. 더 편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멈칫했다. 머리가 쉬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도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 헤매던 그 시간이, 사실은 생각이 자라는 시간이었다. 답이 나오지 않아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던 그 틈, 메모를 들여다보다 딴생각으로 새던 그 여백. 그게 머리를 식히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 여백조차 AI와의 대화로 채운다. 효율은 올라갔는데, 비어 있던 자리가 없어졌다. 쉬면서 생각하던 시간이 아니라, 생각만 남고 쉼이 빠져나간 시간이 되었다.


이과 출신인 나는 고등학교 때 많은 것을 외웠다. 주기율표를 외우고 수학 공식을 외웠다. 암산도 중요했다. 훈민정음 서문이나 웬만한 시들도 다 외웠다. 머릿속에 넣어 두는 일이 곧 공부였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교육받은 내 아이들은 외울 필요가 없다고 한다. 시험 시간에 계산기도 주고, 주기율표도 준다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었다. 정보를 머리에 담는 대신, 정보가 있는 자리를 아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였다.


그런데 이제는 웬만한 질문에 다 AI가 답을 준다. 그러다 보니 답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주기율표는 화학 교과서 앞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AI가 알고 있다. 수학 공식도 참고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AI가 알고 있다.


머리에 넣어 두는 일을 내려놓았고,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일마저 내려놓았다. 인터넷이 끊기면 사라지는 정보들은 이제 인터넷이 없으면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어간다.


생각해 보면 같은 얘기다. 쉬는 시간의 여백도, 무언가를 외워 두던 머릿속의 자리도, 이제는 내 안에 두지 않는다. 바깥에 맡겨 두고, 필요할 때 불러온다. 편해졌다. 그런데 그 편함의 대가로, 내 안에 남아 있던 것들이 하나씩 빠져나간다.


그래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인터넷이 없어도 답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고 기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AI는 영원하리라 믿고, 새로운 방식을 배워야 하는 걸까.


아직 답을 모르겠다. 다만 커피 한잔, 술 한잔 앞에서 아무 답도 구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던 시간이, 요즘 들어 자꾸 그립다.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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