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 못한 소식이었다. 내가 아닌 셋째에게로 연락이 왔다.
실버타운에 계신 시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면회를 왔다 가면 좋겠다는 셋째 시누이의 말을 딸아이를 통해 듣고 잠을 설쳤다.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나는 햇수로 5년을 같이 살았다. 그 세월 동안 내가 싱글이 되었고, 두 노인과는 법적으로는 효력이 없는 심정적으로 가족 같은 관계를 지속했었다. 그들의 아들과 부부의 연을 끝냈다고 매몰차게 당장 내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내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기도 했지만 그 관계를 떠나서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남편이 돈사고를 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혼을 고려했었고,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며 다시 힘을 내어 가정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반복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들의 은행통장을 털어 내게 건네준 사람들이었다. 안 쓰고 안 먹고 안 입으며 알뜰하게 만들어온 돈을 받아 들며 나는 대성 통곡했었다. 그 돈의 값어치를 모를 리 없는 내가 그 돈을 받아 빚을 갚느라 받아 들자마자 공중분해 시키는 그 과정이 너무 화가 나서 며칠을 앓아눕기도 했었다.
훗날 합가한 후 시어머니는 말했었다.
“널 위해 해준 거다. 아이들 키우고 잘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널 위해서”
내 지인은 정신 차리라고 조언했었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 다 믿지 마. 자신의 아들 때문에 해준 거야. 무슨 널 위해 해준 거겠어. 오냐오냐 잘못 키운 자신들은 그 업보를 받는 거지만 니가 제일 불쌍한 거야”
그들의 업보든 내 인연이든 무엇이든 나는 솔직히 고마웠다. 당장 아이들 케어할 자금이 없었는데 선뜻 몇천만 원의 거액을 내어준 어른들의 결단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혼을 결심하면서 내 마음에 걸림돌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자신의 일들을 시작한 자식들은 더 이상 고민대상이 아니었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당연히 아들내외와 노후를 보낼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살아온 두 노인이 갑작스레 갈 곳이 없어진 상황이 더 괴로웠다. 내가 만든 상황은 결단코 아닌데 내가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혼을 거론하는 남편에게 내가 물었었다.
“그럼 당신 부모님들은 어쩌려고? 당신이 모시게?”
물어본 내가 어리석었다. 무슨 답을 기대했는지..
“그냥 내보내. 나 말고도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 그 걱정을 니가 왜 해?. 그냥 짐 싸서 내 보낸다고 전화하고 연락 끊어”
그때 나는 결심을 굳혔었다. 두 노인과 얼마 전부터 같이 살아오던 내 집에서 계속 살아보기로.
같이 살기 시작하니 가려졌던 치부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집요한 자기주장과 그런 시어머니에 억눌려산게 억울한 시아버지의 자잘한 폭력과 분노들.
그동안 나에게 훌륭하고 멋진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동거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모두 드러난 셈이었다.
어이없고 화가 나고 답답한 상황들을 접하면서도 나는 헤어질 결심은 하지 않았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내가 낳은 자식들과도 시끄럽고 껄끄럽게 사는데 나보다 나이가 30살이나 많은 남들이 예외일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어른들에게 나의 필요는 일주일에 다섯 번 병원방문이 가장 컸다. 내가 가장 신경 쓰며 챙긴 것도 그 일이었다. 통증해소를 위해 약을 먹어야 했고 약을 먹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가 필수였다. 결국은 내가 준비하는 음식이 그들을 지탱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이 넷을 키울 때처럼 자주 장을 보며 먹거리를 챙겼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내며 나는 헤어질 결심은 하지 않았지만 헤어질 준비는 했던 것 같다.
고맙고 안타까웠던 마음의 짐을 조금씩 희석시키며 5년 살아왔다는 것을 시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깨달았었다.
‘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같이 살아주셔서 감사해요’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마음이 편안해졌었다. 예상보다 내 눈물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더 힘들어지기 전에 이별할 수 있어 모두에게 다행이라는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었다.
약에 더는 침식당하지 않고 떠난 시어머니의 고통 없는 세상을 기원하며 나 또한 더는 남편의 가족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지 않아도 되어 후련했었다.
작은 아들 집 근처 실버타운으로 이사를 진행하는 그 어떤 과정에도 나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고단했다. 5년 동안 90이 가까워지는 두 노인의 케어는 결코 만만치 않아서 항상 긴장하며 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텨내야만 했었다. 본인들의 부모를 남인 나에게 맡긴 나머지 자식들은 행여 내가 끝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들의 몫이 될까 연락조차 뜸했었다. 물론 자신들의 부모와는 자주 연락했다. 자신들이 아닌 누군가의 힘듦을 알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 사는 게 바빠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솔직히 궁금하지 않았다. 실버타운으로 이사 나가던 날 “죽어도 니 은혜는 잊지 않으마” 하던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내 바람대로 연락은 끊어졌었다.
그런데 오늘 소식을 받았다.
그래. 마지막을 한 번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듣게 될 거라고 추측은 했다.
내 친구들의 부모님 중 배우자 사별 후 2년을 넘기지 못한 분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어쩌면 부고소식이 전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렇게 자신의 분함을 폭력으로 드러내던 시아버지가 “니 어머니 없으면 나는 못 산다”라고 거짓과 참을 섞어하던 고백이 진실이었던 것일까.
그게 부부인 것 같아 참 씁쓸하다. 있을 때나 좀 잘해주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