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참 좋다

by서화

4개월 전 병원에서 ‘대상포진’을 진단받던 순간 내가 한 질문은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한번 걸리면 다시 재발하지 않는 건가요?”


다시금 경험하고 싶지 않은 통증이었다.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답을 듣고 싶었지만 오히려 발현 후 6개월 뒤에 반드시 접종을 해야 한다는 당부를 들어야만 했다. 앞으로도 내 몸이 약해질 때마다 언제든 나를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겁쟁이가 되었다.

만성적으로 나를 괴롭히던 어깨 뭉침과 등의 결림조차 심각한 병의 전조처럼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과중한 가사노동과 정신적 힘듦 속에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후에 찾아올 노년의 삶을 위해서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주일 동안 요가를 해도 걱정과 고민으로 잠을 설친 하룻밤 때문에 내 몸은 다시 뻣뻣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었지만 당장이 아닌 환갑의 내가 건강하고 활기차기를 바라서였다.


그렇게 노력해 온 내가 지금 환갑이다. 그리고 나는 대상포진이라는 불안을 주머니에 넣어 어디를 가도 손끝에 만져지는 공포속을 살고 있다. 그 세월 동안의 노력이 실패라는 결과지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어느 지인이 내게 위로를 건네왔다.

“그동안 많이 애쓰고 버텨 오시느라 몸과 마음이 보내온 신호가 아닐까요. 앞으로의 날을 잘 살기 위한 시그널이요”





15분 정도를 걸어 필라테스 수업을 받으러 다닌다. 시간에 쫓겨 버스를 타기도 하지만 뛰어가더라도 되도록이면 걸으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수업 후였다.


유독 지치는 날이 있다. 땀이 많이 흐르고 수업 중에도 자세를 풀고 쉬어야 할 만큼 힘들고 고단한 날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 날은 계단을 내려오는 것조차 불안하게 다리가 후들거려 난간을 강하게 그러쥐어야만 했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터덜터덜, 누가 봐도 힘든 걸음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버스를 탈까?’

나는 짧은 시간이라도 고민한 내가 싫어 땀을 닦으면서도 건널목을 건너버렸다. 그리고 25분을 훌쩍 넘기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버스 좀 타면 어때서’

지금에서야 나 자신에게 면박을 준다. 결과가 ‘대상포진’이니까.






나는 내가 힘들어야 된다고 믿고 살았다.

고민거리가 있으면 잠을 설치더라도 그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면 해결이 된다고 진심으로 믿고 살았다.


결혼 생활 중 나는 시부모와 같이 절에 다녀야만 했었다. 웬만한 비즈니스맨의 시간표 못지않게 빡빡한 주중의 일과를 마친 일요일에 또 종교적인 스케줄을 이행해야만 했다. 새해불공, 월초불공, 백일불공. 많은 이유로 절을 찾았었다.


어느 날 둘째가 미간까지 잔뜩 찌푸리며 정면으로 나를 보며 화를 냈었다.

“엄마,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절이고 어디고 가서 참회하며 빌어야 하는 거예요. 엄마가 대신 불공해 준다고 아빠가 달라진대요?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시키지 왜 엄마보고 자꾸 하라고 하시는 건데요. 하고 싶으시면 당신만 하라고 해요.”


대꾸하지 않았다. 종교에 매달리는 시간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를 쉬게 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면 어쩌면 효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딸아이의 바른 소리에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설프게 미소 지었고 딸아이는 그런 엄마가 답답했을 것이다.


나는 지치고 힘든 날일 수록 버스를 타지 않았다. 오히려 힘없고 기진한 상태에서 하는 운동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살도 빠지고 몸은 더 단단해지고.


큰애와 둘째를 낳고 1년을 새벽 운동을 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자고 있는 새벽 6시에 걸어서 근처 헬스장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다녔고 덕분에 불어난 체중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육아도 활기차게 할 수 있었다. 그때 코치는 반복적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더 이상 못하겠다 싶을 때 그때부터 하는 것이 진짜 효과가 있어요. 그러니 10분만 더 해보세요”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죽을 만큼 힘들어도 멈추지 못했다. 그것이 운동에 한해서였으면 좋았겠지만 어리석게도 내 모든 인생에 그 원칙을 적용하며 살았다.






큰 아이의 입시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큰아이가 하고 싶은 미래의 일과 그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대학과 과를 선택할지 고민하는 것을 보며 나는 내내 머릿속 한 공간에 그 생각을 새기고 지냈었다. 딸아이가 원하던 학과는 국립대에만 있었고 더군다나 서울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정보력이 자녀의 입시를 좌우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떠돌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입학 사정관제가 처음으로 시작되던 해였으니 똑똑하고 발 빠른 엄마의 노력이 필수처럼 거론되었었다.


나는 생각만 했었다. 버릇처럼 24시간 그 생각을 품고 틈틈이 꺼내 고민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얼핏 든 낮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서울 시립대’라는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딸아이의 담임선생님도 생각 못했던 학교였고 심층면접까지 거쳐 수능 없이 입학하게 되었다. 내 집요함이 이루어낸 결과물 같아 뿌듯했었다.


걱정하며 잠을 설치면 고민거리를 해결할 방법이 제시되 경험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강도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었다.


요즘은 버스를 자주 탄다. 두 정거장 거리지만 운동 후 기운이 없으면 고민 없이 버스의 도움을 받는다.

‘내가 나를 아껴야지 누가 아껴주냐’는 친구의 말에 동감해 더 이상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여유 있게 느긋하게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내버려 두자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여전히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 생각을 바꾼다고 몸과 머리가 변화를 금세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날 세웠던 시간만큼 또 내려놓는 노력도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 여유가 내 삶의 전반에 스며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다행스럽게도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한 가지는 있다.

나는 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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