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식아 잘 지내고 있니?
이렇게 묻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인사차 건넨다.
자식 셋 키우느라, 여전히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는 의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느라 고생이 많다. 너나 나나 참.
며칠 전 영재의 안부 전화를 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20대 중반에 우리가 했었던 그 여행이 불현듯 떠올라 너랑 운식이의 안부를 물어보았어.
“다들 여전해. 힘든 건 여전히 힘들고, 좋은 건 지금도 좋고”
힘든 건 무엇이고 여전히 좋은 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나처럼 너도 운식이도 평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이 갔어.
내가 사는 여기는 사흘 동안 비가 내렸어.
35여 년 전 그때처럼.
동해에서 지내는 사흘 동안 태풍 같은 폭우가 쏟아졌던 것 기억나?
산속 작은 집에서 사흘을 머물면서 우린 바깥출입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었지.
스물여섯의 우리는 지금처럼 다들 여리고 착했었어.
착하다고 말해서 놀랐어? 뭘 새삼스럽게.
남자 다섯에 여자 하나. 이렇게 초등동기 여섯. 우리는 동해안을 걸어서 여행했었지. 지금으로부터 35여 년 전에 말이야.
솔직히 자세한 경로도 주고받았던 말도 떠오르는 건 거의 없어.
10일 가까운 그 여행에서 유일하게 각인된 장소는 동해에 있던 상엽이 누나의 별장 같던 시골집.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냉장고에 가득히 채워져 있던 대게.
사흘 동안 쏟아지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 빗소리.
그리고 잠도 잊고 몰두했던 포커.
우리 아이들에게 한 번씩 젊은 시절의 무용담처럼 꺼낸단다.
“니 들은 24시간 포커해봤어?”
그리 자랑할 만한 놀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 시절 너희들과의 여행처럼 무모하고 자유롭고 하고 싶은 것만 해본 적이 없었어.
그러니 ‘적어도 20대라면 이런 것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내가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인 거지.
‘엄마는 이런 것도 해봤다’ 어깨에 힘 빡 주면서.
핸드폰이 없었으니 여행을 하는 동안 정보도 찾기가 쉽지 않았었고 그저 발 가는 대로 걷다가 먹고 자고 그리고 참 온천욕도 했었다.
몰골이 거지 같아서 때 빼고 광내고 한번 했었지.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모습에 경악하실 부모님들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유일한 여자였던 나를 위한 배려라는 것 나도 고 있었어. 내 상태가 그렇게까지 엉망이었다는 걸 목욕탕 거울로 확인했거든.
너희들은 항상 나를 제일 먼저 배려해 주었어. 먹는 것도 숙소도 언제나 내 선택이 1번이었지. 그래서 내가 이 여행을 평생 잊지 못하는 거야.
이렇게 착한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과연 결혼 전 20대에 이런 모험 같은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세월이 지날수록 감사함과 고마움을 더 크게 느끼고 있거든.
그렇게 ‘여자에게 자유는 독’이라는 우리 엄마를 한방에 잠재우고 나를 끼워 여행을 계획해 준 너희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든든한 내 편들이었는지 내가 한 번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것 같아 이렇게 몇 자 적는다.
우리 엄마도 인정한 거야 너희들이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착한 남자들인지. 그러니 10일 동안의 배낭여행을 딴 조건 안 걸고 허락해 주셨잖아.
50 중반에 접어든 어느 날 동해안의 비바람 치는 그 해변의 풍광 속에 내가 다시 서 있는 꿈을 꾼 적이 있었어. 잠에서 깨고 한참을 토해내듯 꺽꺽 울었어. 두고 온 것이 불현듯 떠오른 듯 애달프고 서럽게 울었어. 그때는 이유 모를 울음에 당황스러웠지만 멈추지 못했어. 잠에서 깬 순간 애틋하고 간절한 감정조차 희미해져 버렸거든.
어쩌면 함께 하기 힘들다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이었을지도 아니면 세상 두려울 것 없었던 그 시절의 우리들이 눈물 나게 그리웠는지도.
상엽이, 영재, 운식이, 종화, 그리고 너와 나.
다 같이 마주 앉아 그때처럼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내 기억 속의 너희들이 35년 전의 그 모습뿐일까 봐 그것도 두렵다.
쉽지 않은 인생이지만 잘 버텨보자.
간간히 바뀐 번호 지금처럼 알려주면서 그렇게 서로를 잊지는 말자.
희식아.
정말 고맙다.
내 인생 여행을 만들어 주어서. 그 여행을 너희들처럼 멋진 남자들이랑 같이 할 수 있어서.
나는 여전히 너희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