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꿈은 네가 알아서 찾는 거야

by서화

나는 인내심이 없는 아이였다. 싫증을 잘 내어 시작한 일의 끝을 보지 못하는 끈기 없고 열정 없는 사람이었다. 나 자신을 소개하며 짧게 덧붙인 말이 “하고 싶은 게 별로 없습니다.” 였으니 열정 없다는 평가를 인정한 것이었다. 인정은 했지만 나를 평가하는 “ㅇㅇ가 없는”이라는 표현은 절대 내가 시작하지 않았다. 나를 그렇게 규정지은 사람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하신 나의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새로운 것을 배우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 한 달 정도를 기다려 주고는 바로 결론을 지으셨다. 그쪽으로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 계속할 거냐고. 그런 득 될 것 없는 사람은 그만 만나라고. 의기소침해서 중단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바로 나의 평가를 쏟아내셨다. 잘하는 것도 없고, 끈기도 없고, 열정도 없고.


근래에 나의 세 딸들은 온라인 게임에서 사람과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 삐그덕 거리던 어긋남을 기름칠하듯 하나씩 까다롭게 조율하여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들을 지켜보던 어느 오후 나는 눈물을 쏟았다. 혼자 있던 시간의 예상치 못한 눈물이었다. 쉬 멈출 수 없어 훌쩍훌쩍 소파에 축 늘어져있는데 명치끝에서 뭉쳐진 숨이 치밀어 올라왔다. 너무너무 억울했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막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나도 분명 이 아이들처럼 출발 선에 섰을 텐데. 부딪히고 넘어지며 온전한 내 영역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젊은 시절의 내가 놓친 것들에 대한 서러운 자바카라이었다.


대학에서 나의 전공은 화학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공부에 한 번도 몰입하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의 치기처럼 전공도 벼락치기 공부로 점수를 따는 것에 그쳤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인생이고 나의 삶인데 회피했고 겁쟁이처럼 권리를 찾을 시도조차 않았다.




중학교 2학년으로 기억한다. 요즘 학교에서 하는 동아리 활동 같은 색다른 수업이었고 나는 과감하게 ‘냉장고 분해’ 수업을 지원했었다. 요즘처럼 성별상관없이 기술과 가정을 같이 배울 수 없던 시기였다. 여자중학교에서는 가정만을 남자중학교에서는 기술만을 배웠었다. 그런 시대에 ‘냉장고를 분해하고 그 원리를 배우고 다시 조립해 볼 수 있는 수업’은 도전을 자극하는 신세계였다.

다음날. 나는 한문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너는 서예반이야”

“저는 서예반은 적지도 않았는데요”

“엄마가 전화하셨어. 서예반으로 넣어달라고”


나는 엄마에게 냉장고를 분해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지원서를 본 담임이 엄마에게 왜 연락을 했을까. 엄마는 왜 나를 서예반으로 옮겨달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모든 선생님들이 왜 내가 아닌 우리 엄마의 의견에 동조하셨을까.

한 학기 내내 나의 글씨는 발전을 보이지 않았다. 애정이 없었으니 당연했고 방학식 전에 열릴 전시회 작품 하나조차 제때 준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선생님들의 독촉이 강하지 않아 내심 안심하면서도 의아했다. ‘한 사람당 하나씩은 필수인데 왜 느긋하시지?’ 전시 일주일 전 서예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엄마가 작품하나 큰 거 써주실 거야. 조심해서 들고 와” 처음부터 계획된 영입이었구나.


같은 수순으로 나는 문이과 선택을 통보받았고 대학원서에 지망학과를 원서 접수직전에 선생님의 설명으로 확인해야 했다.

“어머니가 미리 다 생각을 하고 오셨던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나의 담임은 나의 엄마를 존경한다고 했다.

예상대로 나는 대학에서조차 관심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공부를 지루하게 이어갔었고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기회를 영영 잃었다. 커리어의 무덤이라는 결혼을 함으로써.


안쓰러울 만큼 열심히 살고 있는 내 아이들과 대조적으로 심장 뛴 경험이 없는 나 자신이 무지무지 부끄럽고 창피하다. 결코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삶의 추가 없는 듯 어설펐다. 불안하고 답답했지만 표현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내가 한심하다는 엄마의 평가에 화가 났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나의 잘못이다. 끌려간 내가 문제였다. 어디로 갈지 그 방향은 스스로 정했어야 했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는 시도는 계속했어야만 했다. 비록 엄마의 욕을 좀 듣더라도 말이다.




‘코스비 가족’이라는 미국 시트콤을 기억한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본 것이 몇 살이었는지 구체적인 기억은 없다. 하지만 어느 에피소드에서 아빠의 대사와 표정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코스비 아저씨의 딸은 나랑 비슷했다. 무언가를 시작하면 금방 싫증을 내고 다른 것으로 눈을 돌렸다.

바이올린을 하다 며칠 만에 다른 악기로 바꾸는 등 지켜보던 내가 걱정을 할 만큼 진득하니 해내질 못했다. 새로 산 악기에게 미안할 만큼 아저씨의 딸은 당당하게 그만두고 당당하게 시작했다. 지켜보던 코스비 가족의 지인이 코스비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이가 이렇게 돈을 쓰면서 한 가지를 오래 하지 못하는 현실에 화가 나지 않으세요?”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잘하는지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어떤 악기에 흥미를 느낄지는 해봐야 하는 거니까요. 그게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그 장면이 계속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다.

‘부모의 역할’

크게 다르지 않은 나와 코스비 가족의 딸인데 우린 너무 달랐다. 부러운 감정은 감히 품을 용기도 없었다. 그저 내가 가져보지 못한 ‘부모의 역할’을 내 심장에 새긴 날이었다.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엄마가 된 후 매년 아이들의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에 부모가 바라는 직업을 적는 빈칸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네모난 그 공간이 나를 집어삼킬 듯 커지는 공포를 느꼈었다. 내가 그곳에 무언가를 적으면 그것이 곧 아이들의 미래가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이제 8살이 된 아이가 되고 싶었던 희망은 소방관, 선생님. 생선장수도 있었다. 그렇게 상상으로 꿈을 찾아가던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자격으로 불변의 색과 크기를 고정하는 잘못을 저지를까 몇 시간을 고민한 후 이렇게 적었다.

‘본인이 원하는 것’

‘본인이 되고 싶은 것’

‘본인이 하고 싶은 것’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네 명의 아이 모두에게 같은 바람을 적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유를 설명했었다. “꿈은 바뀌는 게 정상이야. 엄마는 너희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모르잖아. 네 꿈은 네가 알아서 찾는 거야”


다시 도망치지 않았다. 나의 엄마처럼 하지 않았다. 엄마의 자격을 무겁고 귀하게 사용했다. 후회할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 젊음을 가치 없이 소비한 내가 날 용서할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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