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받고 있었다

by서화

날짜가 지난 달력은 가치를 잃는다.

30일 동안 30번 이상 들추던 달력이 낡은 종이 쓰레기가 된다는 뜻이다.


나의 아버지는 달력을 쓰레기로 만들지 않으셨다. 뜯어 내지 않고 13장(표지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달력을 상자 속에 쌓아두셨다. 언니가 처음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부터였다. 아버지는 우리 4남매의 교과서를 달력으로 커버를 만들기 시작하셨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으셨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어떤 종이보다 고급지고 하얗고 깨끗한 커버였다. 재단하고 표지를 감싸 풀로 붙여 고정시키고 반들거리는 하얀 종이 위에 붓으로 예술을 하셨다.

‘국어, 산수, 슬롯, 자연, 도덕, 음악, 미술, 체육’, ‘ㅇㅇ국민학교 ㅇ학년 ㅇ반’ 그리고 마지막 줄에 이름까지. 네 명의 교과서를 모두 커버 씌우고 붓글씨를 쓴다는 것은 쉽게 시작해서 금방 끝낼 수 있는 작업은 결코 아니었다. 두어 시간이 훌쩍 넘는 고된 시간이었다. 아무리 커버를 잘 씌워도 실수로 글자를 틀리면 커버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전날 벼루와 먹, 붓과 신문지를 꺼내 다음날 있을 작업을 미리 준비하셨다. 먹을 어느 정도 갈아야 할지 미리 갈아서 먹의 묽기를 가늠하셨고 쓸모없던 달력종이를 꺼내 몇 글자 쓰셨다. 종이마다 적당한 먹의 묽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먹이 준비되면 신문지에 생각해 둔 서체를 연습하셨다. 궁서체였다. 아버지로부터 붓글씨 연습을 방학 때면 받아왔던 우리들은 그 일련의 과정들이 침묵과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나의 아버지는 붓글씨를 아주 멋지게 쓰시던 분이셨다. 그 당시 근무하시던 학교의 상장은 도맡아서 쓰셨다. 그럼에도 자식들의 교과서를 위해 미리 연습을 하셨었다. 내가 부모가 된 지금 되돌아보니 아버지에게는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 기꺼운 부모의 행복이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작업을 하시던 중에 간간히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경외심을 내뱉으며 둘러앉아 있던 우리들을 아주 흐뭇하게 보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우리 남매는 표지용으로 가장 좋은 은행달력은 사용하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낙서 하나 없이 보관했다. 그림이 없고 숫자만 커다란 은행달력은 뒷면이 비치지 않고 깔끔해서 가장 좋은 재료였다. 적당하게 두텁고 적당히 반짝였다. 몇 해 전 달력인지는 뒤집힌 면으로는 알 수 없었고 친구들은 그 멋진 커버가 달력종이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5학년이 되면서 나는 나의 바카라 커버는 스스로 쌀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손놀림을 매년 눈으로 배웠고 더럽혀지고 찢어진 커버를 혼자서 새롭게 만들어보기도 하며 실력이 많이 늘었었다. 반듯하게 자로 선을 긋고 칼로 재단한 다음 손톱으로 눌러 종이를 단정하게 접으며 아버지를 따라 했다.


나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5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아버지를 도와 동생들 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커버만 씌울 수 있어도 좋았다. 내가 아버지와 같이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방해되지 않도록 적당히 떨어져 둘러앉아 커버를 씌우는 아버지의 손놀림을 감탄하며 바라보는 시간은 우리 집만의 의식이었다. 아버지가 진급하는 자식에게 전하는 격려사 같았다. 아버지는 말은 없으셨다. 말이 없었다고 그 마음을 모를 우리들도 아니었다.





멋진 궁서체로 덧 입혀진 교과서는 가방에서 꺼낼 때마다 어깨가 우쭐했고 조심조심 흐트러지지 않도록 반듯하게 바카라상 위로 내려놓았다. 내 앞에 놓인 바카라인 어떤 바카라인지 알 수 없다가도 아버지의 글씨체가 위로 가게 뒤집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가만히 손을 들어 아버지의 글씨를 매만졌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 써보기도 했다. 귀한 선물에 걸맞은 내가 된 듯 뿌듯했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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