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직 살아있다는 것

by담서제미

화병에 꽃을 꽂아둔 지 이 주가 넘었다. 딸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처음 꽃을 화병에 꽂았을 때는 이렇게 오래 곁에 있을 줄 몰랐다. 꽃은 피고 지는 것이 순리라고 여겼다. 며칠 눈을 즐겁게 하다가 어느 날 고개를 떨구고, 꽃잎을 흩뜨리며 제 생을 마치는 것. 그래서 꽃을 바라보는 일에는 늘 얼마간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오늘 아침, 화병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살아 있었다. 분홍빛 작은 꽃들은 빛이 바랬어도 꽃의 모양을 잃지 않았고, 보랏빛 가지는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갓 들여왔을 때의 싱싱함은 없었다.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앉아 있었다. 활짝 핀 꽃에서는 볼 수 없는, 오래 견딘 꽃에게서만 나는 고요함이었다.


한 송이씩 손으로 살폈다. 마른 잎을 떼고, 오그라든 꽃잎을 골라냈다. 가지 사이에 숨어 있던 작은 잎을 손끝으로 눌러보니 어떤 것은 아직 탱탱했고, 어떤 것은 종잇장처럼 바스락거렸다. 산 것과 죽어가는 것이 한 줄기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가려내는 데 뜻밖에 시간이 걸렸다. 예전 같으면 한꺼번에 뽑아 버리고 남은 것만 다듬어 꽂았을 것이다.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늦게 시드는 꽃에게는 하루쯤 더 주고 싶었고, 아직 색을 쥐고 있는 꽃은 끝까지 제 자리에 두고 싶었다.


화병의 물을 쏟아냈다. 물빛이 흐릿했고 줄기 끝이 미끈거렸다. 병을 씻고, 줄기 끝을 비스듬히 잘라 새 물에 꽂았다. 찬물이 유리에 닿는 소리가 났다. 꽃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군데군데 빈 데가 생겼고 처음처럼 풍성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한결 단정해 보였다. 빈 데로 빛이 들어와 남은 꽃의 색이 또렷했다.


문득 사람도 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는다. 젊음이 그렇고 체력이 그렇고, 한때 당연했던 관계와 기회와 자신감도 조금씩 빠져나간다. 거울 속 얼굴은 어느 날부터 예전 얼굴이 아니고, 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면 자꾸 예전의 나를 떠올린다. 더 예뻤던 나. 더 힘이 넘쳤던 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나.


꽃은 어제의 꽃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활짝 피었을 때는 핀 채로, 시들기 시작하면 시드는 대로, 마지막 꽃잎을 달고 있을 때는 그 한 장을 단 채로 오늘을 산다. 물이 들어오면 받아 마시고, 빛이 들면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누가 마른 잎을 떼어주면 가만히 맡긴다.


시든 꽃잎 하나를 떼어냈다고 꽃 전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떼어낸 자리에서 남은 것이 보였다. 나 역시 꽤 많은 것을 내려놓고 여기까지 왔다.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 인정받고 싶던 마음, 남들이 그어놓은 기준, 젊은 날의 욕심 같은 것들. 그때는 하나를 놓을 때마다 무언가를 잃는 것 같았다. 지나고 보니 그 빈자리가 새것이 들어올 자리가 되어 있었다. 화병에 생긴 빈 공간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견디는 일이 아니라, 때때로 내 안의 마른 잎을 알아보고 조용히 떼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 남은 것을 손으로 만져가며 돌보는 일.


새 물을 갈아준 화병을 제자리에 놓았다. 처음 들였을 때의 화려함은 없었다. 대신 오래 살아낸 날들의 흔적이 있었다.


꽃이 며칠을 더 버틸지는 모른다. 내일 시들 수도 있고, 한 주쯤 더 갈 수도 있다. 오늘 아침에도 꽃은 살아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물을 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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