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빛이 달라졌다. 꽃병의 꽃을 다듬다 창밖을 보니, 며칠 전까지 유리창에 매달려 있던 여름빛이 어느새 한 뼘 물러나 있다. 햇살은 여전히 환한데 온기가 덜하다. 바람은 말없이 계절의 옷자락을 바꿔 놓고, 나뭇잎은 아직 푸른 얼굴로 가을을 맞을 채비를 한다.
계절은 소리보다 먼저 몸으로 온다. 목필균의 「9월」을 펼친다.
9월 - 목필균
태풍이 쓸고 간 산야에
무너지게 신열이 오른다
모래알로 씹히는 바람을 맞으며
쓴 알약 같은 햇살을 삼킨다
그래, 이래야 계절이 바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계절이 가는데
온몸 열꽃 피는 몸살기가 없을까
날마다
짧아지는 해 따라
바삭바삭 하루가 말라간다
시인은 이 계절을 곱다고 하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열이 오르고, 바람은 모래알처럼 씹히고, 햇살은 쓴 알약처럼 삼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9월은 앓는 몸이다. 산야도, 바람을 맞는 사람도, 한 계절을 보내야 하는 시간 자체도 그렇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한 계절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리 없다. 봄을 지나 여름을 건너오는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두고 왔다. 영원할 것 같던 마음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던 날들도, 미처 작별하지 못한 얼굴들도 계절 뒤편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면 마음 한구석이 시큰하다. 무엇이 슬픈지 알 수 없는데 슬프고, 무엇을 잃었는지 손에 잡히지 않는데 하나를 놓친 것만 같다. 시간은 물건이 아니라, 다시는 똑같이 오지 않을 순간을 가져가는 모양이다.
한 계절이 가는데 몸살기가 없을까
이 구절에서 오래 멈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계절. 그 시구를 읽는 순간 계절은 인생이 된다. 우리에게도 돌아오지 못하는 계절들이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던 계절, 부모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젊었던 계절,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계절.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 몰랐다. 그래서 더 오래 바라보지 못했고,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순간은 대개 지나가는 중에는 귀한 줄 모른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요즘 나는 하루를 조금 천천히 들여다본다. 아침이면 꽃잎의 가장자리를 살피고, 산바카라길 나무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햇살이 머무는 자리에 잠시 앉았다 일어난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이 이제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가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의 마지막 연이 다시 마음에 내려앉는다.
짧아지는 해, 바삭바삭 마르는 하루
바삭바삭. 이 의성어 하나가 이상하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젖어 있던 잎이 햇빛에 마르고, 마른 잎이 바람에 부서지듯 하루도 그렇게 말라간다. 어제의 하루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고, 오늘의 하루도 저녁이 되면 조용히 내 손을 떠난다.
그러니 붙잡으려 하기보다 잘 보내야겠다. 꽃이 피는 날에는 꽃을 보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바람을 맞고, 좋은 사람과 마주 앉은 날에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아야겠다. 언젠가 그 모든 것이 한 계절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계절은 떠나며 빈자리를 남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낸 시간의 온기와 미처 하지 못한 말과 한때 사랑했던 것들의 흔적이 거기 고여 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므로. 오늘도 짧아지는 햇살 아래 앉아한 계절을 배웅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잘 가라, 나의 9월. 다시 오지 않아도 괜찮다. 한 번 내 삶에 머물렀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