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에 한 번, 우리는 모인다. 그래서인지 나눌 이야기는 늘 차고 넘친다. 지난 모임에서 청년취업 업무를 맡고 있는 후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쉬고 있는 청년들, 그 자체를 인정해줘야 해요."
순간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말이 아니었다. 슬롯도, 부모도 입을 모아 하는 말은 늘 하나였다. 쉬지 말고 어서 나가라, 취업하라, 뭐라도 하라. 그런데 그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쉼 자체가 그들의 문화라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 떠밀면 결국 은둔과 고립으로 빠진다고 했다.
몇 년째 청년 상담을 해온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쉼이 그들에겐 힐링이더라고요. 충분히 쉬고 나면 스스로 구직활동을 시작해요. 영원히 쉬겠다는 게 아니라, 도약을 위해 잠깐 멈춘 거예요. 그걸 못 참고 자꾸 문제 삼으니까 문제가 더 커지는 거죠."
나는 오랫동안 고용 현장에서 일을 한 사람이다. 수많은 청년을 만났고, 그들의 이력서를 들여다봤고, 면접 준비를 도왔다. 그런데도 그 순간 부끄러웠다. 나 역시 은연중에 쉼을 문제로 여긴 적이 많았다. 상담실에 앉은 청년이 몇 달째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을 인정하기 이전에 걱정부터 했다.
퇴직하고 나서야 나는 쉼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삼십 년 가까이 일에 매여 살다가 갑자기 손에서 일을 놓았을 때, 처음 몇 달은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조바심이 났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스스로 만든 시간표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달력을 넘기다 문득 알았다. 이 조급증은 오래 몸에 밴 습관일 뿐,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쉼을 허락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정 없는 오후에 바카라을 펴고, 이유 없이 걷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뎌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시간을 지나고 나니 다시 뭔가 쓰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쉼이 나를 게으르게 만든 게 아니라, 다시 움직일 힘을 채워준 셈이다.
청년들의 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는 무언가 다시 채워지고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 쪽에 있는 건 아닐까. 자식이 조금만 늦어져도 조바심을 내는 부모, 통계와 지표로 청년을 평가하는 슬롯, 그 모두가 쉼을 게으름이나 실패의 증거로 읽어버린다.
그러나 후배의 말대로, 쉼을 쉼으로 인정받지 못한 청년은 결국 세상 밖으로 나오는 대신 더 깊이 숨어버린다. 조급함이 만든 재촉이 오히려 은둔을 부추기는 역설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잘 쉴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확실한 취업 지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쉼은 도피가 아니라 도약을 위한 웅크림이다. 개구리가 멀리 뛰기 전에 몸을 낮추듯, 사람도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기 전엔 잠시 멈춰 서야 한다. 그 멈춤을 참지 못하고 등을 떠밀면, 웅크렸던 몸은 펴지지 못한 채 굳어버릴 뿐이다.
수 년간 상담 현장에서 얻은 후배의 결론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것이 이론이 아니라 수많은 얼굴을 마주한 뒤에 얻은 확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제는 그것을 공감한다. 쉼을 인정하는 일이 곧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인정이야말로, 누군가 다시 걸어 나올 수 있는 첫걸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