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사람들

by담서제미

바카라을 반납할 겸, 운동도 할 겸 집을 나섰다. 여전히 더웠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과 정수리로 내리 꽂히는 볕이 만만치 않았다.


'이 더위는 언제쯤 끝나려나' '곧 끝나겠지. 조금만 참아' 독백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높았고, 빛깔은 어느새 가을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계절은 하늘에서 먼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문화센터 문을 밀고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훅 끼쳤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마다 온도가 한 단씩 낮아지는 것 같았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늘 종이 냄새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오래된 종이와 새 종이가 섞인,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다.


빌려갔던 바카라을 반납함에 넣고 바카라장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요즘은 소설을 붙들고 있다. 이번에 고른 것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박완서의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였다.


한쪽은 백여 년 전 런던과 파리를 오가고, 다른 한쪽은 이 땅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붙잡는다. 시대도 언어도 다른 두 바카라을 손에 들었다. 바카라장을 이리저리 훑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등 뒤로 서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짧아졌다.


바카라을 고르고 돌아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창가 자리에 빈 의자가 하나도 없었다. 늘 한두 자리는 비어 있던 곳인데, 오늘은 사람들이 촘촘히 앉아 저마다의 바카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볕이 그들의 어깨 위에, 펼쳐진 바카라장 위에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누구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며 읽었고, 누구는 턱을 괴고 한참을 한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도서관의 정적을 깨뜨리는 건 바카라 넘기는 소리 뿐이었다.


그 풍경 앞에서 나는 한동안 서 있었다.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저렇게 나란히 앉아 각자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어떤 이는 런던의 안개를 걷고 있을지 모르고, 어떤 이는 이 땅 어느 골목을 서성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 모든 걸음이 같은 창가, 같은 빛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도 한때는 저 의자에 앉아 오후를 다 흘려보내던 사람이었다. 작장생활을 하면서 차츰 그런 여유가 사라져 갔지만 오늘은 급할 것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바카라을 읽고 있는 그들의 등 뒤로 가을이 슬쩍 내려앉았다.


밖으로 나왔다. 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걸음이었다. 손에 들린 두 권의 바카라과 창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뒷모습이 잔상처럼 머물러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사람이 바카라을 펼치는 것도 어쩌면 같은 일인지 모른다고. 그것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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