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함이 주는 힘

『노인과 바다』가 끌어 당긴 아침

by담서제미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 사건도 없는데, 하염없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홀로 돛단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그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84일간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노인이 바다로 다시 나가는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손에 쥐어진 결과가 없어도 묵묵히 계속해 나가는 그 힘.


어려서 이 글을 접했을 때 '이 문장은 뭐지'라며 호기심이 일었다. 읽어 내려갈수록 나는 어느새 노인의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노인과 함께 바닷속에서 사투를 벌였다.


노인은 첫 문장에서부터 이미 84일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사람으로 나온다. 소년의 부모조차 그와 함께 배를 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도 노인은 여든다섯 번째 아침에 다시 배를 밀고 나간다. 그 걸음에는 요란한 각오도,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도 없다. 그저 늘 하던 대로 밧줄을 풀고 노를 젓는다.


나는 담담하게 묵묵히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그 노인을 마음에 품었다. 젊었을 때는 실패를 견디는 데에도 무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거나, 눈물을 훔치거나, 무언가 결연한 장면이 있어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상담실에서 삼십 년 가까이 마주 했던 이들 중에서도, 끝내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은 대개 묵묵한 쪽이었다. 실패를 유난스럽게 대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에 그저 다시 문을 여는 사람들.


퇴직을 하고 나는 종종 그 노인의 새벽을 떠올렸다. 청새치를 만나기 전 84일의 빈 그물, 그 무수한 날들이 실은 이야기의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였다는 것을.


큰 고기를 낚는 하루보다 아무것도 낚지 못한 채 배를 씻고 그물을 정리하던 무수한 날들이 그를 만들었다는 것을. 그 문장을 다시 읽을 때마다 나는 내 바카라상 앞의 84일들을 헤아려본다. 채워지지 않은 원고지, 되돌아온 답장, 그럼에도 다음 문장을 이어 쓰던 손.


오늘 새벽. 『노인과 바다』속 문장이 나에게 왔다는 것은 내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것을 어루만지기 위해 84일 동안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그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바다로 나가는 노인이 필요했다.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내고야 마는 노인. 노인이 노를 젓는 데 요령이 아니라 리듬이 필요했듯, 나에게도 하루치의 리듬이 필요하다. 잘 써지지 않는 날에는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낮은 목소리로 일러둔다.


바다는 노인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가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 역시 그렇게, 바카라상 앞에 앉는다. 팔십사 일이 지나도 다시 노를 젓는 것. 그것이 내가 이 문장을 오래 담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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