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통에 담긴 추억

by담서제미

저금통을 털었다. 언젠가 은행에 가서 지폐로 바꿔야지, 그런 생각을 한 게 몇 년째였다. 카드와 페이앱을 사용하면서 현금 쓸 일은 눈에 띄게 줄었고, 동전을 저금통에 넣는 손짓도 차차 뜸해졌다. 그렇게 저금통은 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강의 『검은 사슴』을 소파에 파묻혀 읽던 오후였다. 문장을 따라가다 문득 고개를 든 순간, 낡은 깡통 저금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잊고 지낸 물건을 마주친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화장지를 넉넉히 깔고 그 위에서 저금통 뚜껑을 열었다. 십원, 오십 원, 백 원, 오백 원짜리가 차르르 쏟아지며 화장지 위에 작은 산을 이루었다.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하나씩 숫자를 헤아리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나는 숫자를 세는 게 아니었다. 동전의 얼굴을 하나씩 들추며 지나간 시간을 세고 있었다.


어릴 적 배가 볼록해진 빨간 돼지저금통을 카터칼로 가르던 날이 흑백 화면처럼 떠올랐다.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쏟아진 동전을 세던 저녁, 형제들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그득했다.


혹시 나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던 마음,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해 자꾸 곁눈질하던 얼굴들. 엄마가 손에 쥐어주던 동전 몇 닢으로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을 사 먹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스쳐 지나갔다. 입안 가득 달던 그 단맛, 혀끝으로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골목을 걷던 걸음걸이까지도.


동전 하나하나가 그때의 방 안 온도를 품고 있었다. 형제들의 어깨가 부딪히던 좁은 방, 백열등 아래 반짝이던 동전의 표면, 다 세고 나면 누군가 손끝으로 탑처럼 쌓아 올리던 십 원짜리 무더기.


돈의 액수보다 그 시절의 냄새와 소리가 먼저 되살아났다. 창호지 문 너머로 들리던 저녁밥 짓는 소리, 마루를 걷는 발소리, 그 사이사이 짤랑거리던 동전 소리.


지금 화장지 위에 쌓인 동전은 그때와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 액수였다. 만원 몇 장 남짓, 어쩌면 그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손을 떼지 못하고 자꾸만 뒤적였다. 액수를 확인하려는 손이 아니라, 지나간 얼굴들을 하나씩 짚어보려는 것처럼.


돌이켜보면 동전을 세던 그 저녁마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의 실체는 지금도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콩고물이었는지 아니면 다 같이 모여 앉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그 시간 자체였는지.


지폐는 지갑 속에서 조용히 접혀 있지만, 동전은 손 안에서 소리를 낸다. 짤랑거리며 존재를 드러낸다. 아이였던 나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소리가 곧 기다림의 증거였으니까.


세어보니 사만 삼천 원 남짓이었다. 지폐로 바꾸러 가야지에서 굳이 당장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머물렀다. 이 동전들을 당장 지폐로 바꾸지 않아도 괜찮았다.


화장지 위에 펼쳐진 채로 며칠 더 두어도 좋겠다고. 오며 가며 눈에 띌 때마다 그날의 방 안 풍경을, 형제들의 눈빛을, 눈깔사탕의 단맛을 한 번씩 더 꺼내 보고 싶었다.


동전은 무게로 존재를 증명한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그 무게만큼 사람을 붙든다. 나는 오랜만에 그 무게에 붙들려 오후 한나절을 흘려보냈다.


『검은 사슴』은 소파 팔걸이에 펼쳐진 채 그대로 있었고, 바카라장 위로는 오후의 뜨거운 볕이 비스듬히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바카라 대신 동전을 읽었다. 몇 줄의 문장보다 더 오래, 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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