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며느리가 베네치아에서 사 온 에코백을 메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쿠아 알타, 물이 차오르는 도시라는 이름이 새겨진 가방이다.
딸이 쉬는 날이면 늘 그렇듯 함께 나섰다. 도서관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바카라을 펴는 시간, 우리 모녀에게는 이보다 편안한 오후가 없다.
여름을 앞두고 사둔 바카라은 진작에 다 읽었다. 읽고 싶은 바카라이 있어 주문할까 하다 도서관에 간 김에 대출을 해 볼까라는 마음으로 찾았더니 이미 대출 중이었다. 서가를 훑다 손에 잡히는 대로 다른 바카라 한 권을 뽑아 들었다. 큰 기대 없이 집어 든 바카라이었다.
돌이켜보면 읽기 시작한 바카라을 중간에 덮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루해도, 어려워도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것이 나름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름, 그 원칙이 처음으로 깨졌다. 평이 좋아 기대를 안고 펼친 바카라이었다.
문장은 자꾸 미끄러졌고 내용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절반쯤 읽었을 때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좋은 바카라이라는 말을 믿고 몇 번을 다시 붙들었지만, 결국 바카라장 한쪽에 도로 꽂아버렸다.
대신 도서관에서 빌려 온 바카라을 바카라상 위에 펼쳤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페이지가 뜻밖에 술술 넘어갔다. 문장과 문장 사이마다 징검다리가 놓인 듯했다. 한 발 디디면 다음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리듬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삼매경이었다.
잠시 바카라에서 눈을 떼고 생각에 잠기는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감탄이 새어 나오는 대목도 있었다. 딸도 제 바카라에 몰입해 있었다. 바카라장에 꽂아둔 그 바카라을 떠올렸다. 평단의 찬사도, 두꺼운 무게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읽는 이에게 가닿지 못하는 문장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라도 읽히지 않으면 그저 종이일 뿐이다. 술술 읽히는 문장 하나가, 어렵게 쓰인 백 페이지보다 오래 남을 때가 있다.
가방을 메고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는 길, 물이 차오르는 도시의 이름을 다시 한번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어떤 바카라은 밀물처럼 밀려와 마음을 채우고, 어떤 바카라은 발밑에서 스르르 빠져나간다. 그 차이를 가르는 것은 결국 얼마나 잘 읽히느냐, 그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