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을 정리하며

by담서제미

입추가 지나고 이틀이 흘렀다. 그날부터 베란다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너무 덥다는 핑계로 자꾸 미뤘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로 나갔다.


한때는 울긋불긋 찬란하게 빛나던 화분들이었다. 봄, 가을, 겨울을 채우던 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 것도 있었고, 겨우 잎 몇 장으로 버티는 것도 있었다. 줄기만 앙상하게 남은 것, 형체 없이 그대로 녹아내린 것도 있었다. 전쟁을 치르고 난 자리 같았다. 상흔이라는 말이 그대로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말라버린 잎을 하나씩 떼어내고, 녹아버린 줄기를 뽑아냈다. 흙 속에 남은 뿌리를 손끝으로 확인하며 정리를 이어갔다. 손이 흙투성이가 되어갈수록 마음 한구석도 함께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빈 화분이 하나둘 늘어갔다. 다섯 개가 되었을 때,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 빈자리들을 바라보았다.


빈 화분은 실패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을 조절했더라면, 그늘막을 쳐줬더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다시 들여다보니 그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여름을 온몸으로 통과한 자리였다. 이 계절의 더위는 유난했다. 사람도 견디기 힘든 폭염이었으니, 뿌리내린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식물들에게는 더 혹독했을 것이다. 살아남은 것들이 오히려 대견했다.


문득 나의 지난 계절들이 떠올랐다. 서른 해 가까이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지냈다. 그 시간 동안 나도 몇 번은 잎을 떨구고, 몇 번은 줄기만 남은 채 버텼다. 누군가는 그 시절을 지나오지 못하고 떠나기도 했고, 나는 어떻게든 뿌리를 붙들고 살아남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 버팀의 결과일 것이다.


빈 화분 다섯 개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았다. 비어 있다는 것이 꼭 상실만은 아니었다. 새로 심을 무언가를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흙을 새로 채우고, 가을에 어울리는 것을 심으면 될 일이었다. 계절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 아침 공기에 스며든 서늘한 기운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살아남은 화분들의 잎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몇 장 남지 않은 잎이었지만 여전히 초록이었다. 그 초록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사라진 것들을 애도할 시간도 필요했지만, 남은 것들을 돌보는 일이 먼저였다. 정리를 마치고 베란다 창을 열어두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아직은 한 여름이지만 나는 이미 그 속에서 가을을 느끼고 있었다.


빈 화분 다섯 개는 당분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무엇을 심을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계절이 오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거장이라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