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라는 이름

by담서제미

문학이든, 미술이든, 운동이든, 노래든 분야를 막론하고 한 분야의 거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저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무용의 거장이자 살아 있는 전설, 배정혜 무용가의 출판기념회를 다녀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미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분들의 얼굴을 봤다. 그저 얻어진 타이틀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결과를 가지고 논한다. 그 자리에 오기까지 그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화려함만을 눈에 담는다. 거장이라는 소리를 듣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게 겪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날 행사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어떤 기운에 압도당했다. 그 자리에는 평생을 무용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흰머리가 성성한 이들도 있었고,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후배들을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허리를 굽혔고, 손을 맞잡았고, 오래된 사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편안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 풍경을 지켜보며 나는 문득 내가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나 역시 글을 쓴 지 스물일곱 해가 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배정혜 선생의 무대 앞에 서니, 내가 쓴 세월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한 분야에서 거장이라 불리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밤을 무릎과 발끝의 통증과 씨름했을까.


얼마나 많은 무대에서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을까. 사람들은 오늘의 그를 보며 박수를 치지만, 그 박수 뒤에 감춰진 수십 년의 무명과 좌절, 반복된 실패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종종 결과만 보고 부러워하는 시선들을 마주한다. 바카라을 냈다는 것, 상을 받았다는 것, 어떤 자리에 섰다는 것. 그러나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은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 역시 서른이 넘어 등단하고, 삼십 년 가까이 직업 상담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붙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은,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나를 살아 있게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배정혜 선생의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얼굴들은 하나같이 그런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지만, 그 몸에는 무수한 연습실의 밤들이 새겨져 있었다. 거장이라는 이름은 재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재능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재능을 붙들고 버텨낸 시간, 실패해도 다시 무대에 서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 그리고 그것을 알아봐 준 스승과 동료들의 손길이 함께 쌓여야 비로소 거장이라는 이름에 도달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겸허해졌다.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원고지 한 장, 문장 하나가 얼마나 하찮게 느껴지던지. 그러나 동시에 위안도 얻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더딘 걸음이,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과정으로 읽힐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거장의 자리에 오른 이도 처음에는 서툰 몸짓 하나로 시작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래도록 그 얼굴들을 떠올렸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살아낸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나 역시 남은 시간 동안 결과에 조급해하지 않고, 오늘 하루의 문장 하나에 충실하기로 다짐했다. 거장이라는 이름은 목표가 아니라, 묵묵히 걸어온 시간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그 흔적을 남기기 위해, 나는 오늘도 바카라상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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