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하고 찬란한 청춘

엄마라는 그늘

by담서제미

"아야, 젊은 사람이 밤에 혼자 다니면 안 되야."

"허걱, 엄마 나 육십이 넘었다고요. 젊기는 뭐가 젊어요."

"육십이면 청춘이지, 청춘. 밤늦게 운동 갈 생각 말고, 가려면 박서방이랑 같이 가거라."


여든여섯 엄마 입에서 나온 말에 순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나이 예순을 훌쩍 넘어 이미 인생의 가을길을 걷고 있건만,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밤길을 혼자 서성이다 나쁜 사람이라도 만날까 마음 졸이게 만드는 어린아이 일 뿐이었다. 환갑 넘긴 딸과 팔순 훌쩍 넘긴 어머니가 나누기엔 어딘가 묘하고도 다정한 이 풍경은,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모인 식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엄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거하게 차려진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대화가 익어가고 그릇들이 비워갈 때쯤에는 너무 배가 불러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식당을 나서며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부룩한 배를 달랠 겸, 밤바람을 맞으며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면 참 좋겠다 싶었다. 그 소박한 계획은 엄마의 단호한 한마디에 그대로 가로막히고 말았다. "젊은 사람이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엄마의 걱정. 예순 넘은 딸이 혼자 밤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엄마 눈에는 불안했던 모양이다.


결국 엄마 걱정을 거역할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남편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조용히 올랐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밤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져 왔다. 내 나이 예순. 세상에서는 이미 누군가의 어른이자 선배로, 삶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이로 대접받는 나이다.


거울 속 내 얼굴에는 지나온 세월의 훈장 같은 주름이 자리를 잡았고, 머리카락 사이사이로는 희끗희끗한 새치가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이 세월의 흔적들도 여든여섯 엄마의 눈길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엄마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였다.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세상을 아는 척하고,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왔다 한들, 엄마의 아득한 사랑 안에서는 그저 언제든 손을 잡아주어야 할 딸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혼자 서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라 생각했건만, 엄마라는 존재는 그 모든 세월의 법칙을 단숨에 무력화해 버린다.


집에 도착한 뒤, 엄마의 거룩한 어명을 완성하기 위해 결국 남편 손을 잡고 동네를 한 바퀴 걸었다. 식당에서부터 걸어오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진 밤길을 조용히 거닐었다. 나란히 걷는 남편의 온기와, 우리를 배웅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던 엄마의 마음이 겹쳐지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밀려왔다.


"육십이면 청춘이지, 청춘."


엄마가 던진 그 무심하고도 깊은 한마디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세상 모든 이들이 나에게 "이제는 쉬어갈 나이"라거나 "지긋한 나이"라고 말할 때, 오직 엄마만이 나를 향해 "너는 아직 청춘"이라고, "너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내 아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딸에게 그 어떤 비바람도 미치지 못하게 막아주고 싶어 하는, 크고 아득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예순이 넘어서도 돌아갈 품이 있다는 것, 늙어가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어린 딸'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이 내려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엄마라는 커다란 그늘 아래 서 있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다시 천진난만한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동네 한 바퀴를 다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세월이 더 흘러 내 머리가 눈처럼 하얗게 세어버린다 해도, 엄마 눈 속에 담긴 나는 언제나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세 살배기 아이일 것이다.


그 눈빛이, 그 다정한 호통이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러주기를 가만히 기도해 본다. 엄마의 그늘 아래서 걷는 이 길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찬란한 청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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