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by담서제미

2026년 달력을 넘기다 순간 손끝이 멈췄다. 붉은 날 몇 개가 포도알처럼 박힌 8월의 첫 장.

'8월이라니.'


2026년도 이제 남아있는 달력이 겨우 네 장뿐이었다. 한 해의 반환점을 지나 어느새 저물어가는 쪽으로 기울어진 시간. 문득 올해도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마치 내가 지나온 세월처럼.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오랜 온라인 게임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난 후, 내 삶에서 가장 먼저 희미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간'과 '요일'에 대한 감각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듯 나를 채찍질하던 알람 소리도,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가던 간절함도 퇴직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월요일이 월요일 같지 않고, 금요일이 금요일 같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간의 거친 파도가 지나간 자리, 나는 나만의 조용한 시간표를 다시 그려 넣기 시작했다. 누군가 강제로 쥐여준 일정이 아닌, 내가 온전히 주인이 되어 만든 하루의 흐름. 아침에 눈을 떠 정갈하게 차려먹는 식사와, 손가락 끝에 닿는 악기의 감촉, 물속을 유유히 가르는 몸짓. 그 사이사이 좋아하는 문장을 수집하듯 이어가는 글쓰기가 하루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어느덧 내 삶은 내가 정해 놓은 규칙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유연하고도 견고한 루틴 덕분에 나는 일상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젊은 날의 시간표가 나를 속박하고 평가하는 엄격한 잣대였다면, 지금의 루틴은 그저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울타리일 뿐이다. 규칙대로 살아가며 일상이 주는 안도감을 누리되, 문득 바람을 쐬고 싶거나 자유롭고 싶은 날엔 망설임 없이 그 울타리를 벗어던진다.


오늘 꼭 하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 늦게 가거나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아도, 내 삶의 궤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달력 속 8월의 숫자들을 가만히 쓸어본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결속에서 남은 시간이 다가온다.


시간은 지류를 벗어난 강물처럼 멈춤 없이 흘러가고, 살아온 날들의 무게는 살아갈 날들의 길이보다 점점 더 무거워질 것이다. 길거리의 배롱나무 그림자가 매일 조금씩 다른 자리에 눕듯, 그 이동은 조용하고 거스를 수 없다. 남은 네 장의 달력은 '남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내 의지대로 채워나갈 '자유로운 공간'이다.


요일을 잊어도 좋을 만큼 매일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애달픈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지어낸 삶의 절경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나는 오늘도 나만의 규칙을 기꺼이 이행하고, 또 언제든 그것을 즐겁게 벗어던질 준비를 한다. 나에게 주어진 남은 계절들을 향해, 아주 느리고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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