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나만의 아지트들이 있다. 마음껏 물살을 가르며 잡념을 씻어내는 수영장, 푸른 숨을 내뿜는 앞산 산바카라로. 동네 공원에 있는 황톳길.
수영장에 가지 못한 날이나 앞산에 오를 기력이 남지 않은 날이면, 나는 주저 없이 집 앞 조그마한 동네 공원으로 향한다.
어린아이들의 쉼 없는 웃음소리가 가득한 놀이터 한편에는 자그마하게 조성된 맨발 걷기 황톳길이 있다. 울창한 나무숲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발을 내딛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나의 또 다른 아지트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황톳길 초입에 서서 첫발을 디디는 순간, 굳어있던 온몸의 감각이 일제히 깨어난다. 걷기 좋게 알맞게 물이 뿌려진 황토는 말랑말랑하고 촉촉하다. 발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진흙의 질감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든든하게 체중을 받쳐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바닥 전체로 황토의 진득한 촉감을 느끼며 천천히 트랙을 돈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이 자극은 걷는 내내 온몸의 혈관을 타고 올라와, 마침내 복잡하게 얽혀 있던 머릿속을 맑게 비워낸다.
멍하니 발밑에 집중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둔탁했던 뇌리마저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땅이 가진 온기가 몸속의 독소를 흡수하고, 그 자리에 맑은 청량감을 채워 넣는 듯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 황톳길에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힘은 따로 있다. 황톳길이 주는 신체적 안식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마음을 두드리는 것, 바로 놀이터 중앙에 설치된 정자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노랫소리다.
처음 그 노랫소리를 들었던 날을 기억한다. 황토의 촉감에 취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던 중, 어디선가 박자를 조금씩 놓치면서도 흥겨운 노랫가락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라디오를 켜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문적인 음원 소리도 아니었다. 이상하다 싶어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무 뒤편인가, 아파트 창문 너머인가.
시선의 끝이 도달한 곳은 다름 아닌 놀이터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나무 정자였다. 그곳에는 넷, 혹은 다섯 명의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계셨다.
유심히 관찰해 보니 할머니들의 일상은 정겨웠다. 오후가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정자로 모여드셨다. 각자의 집에서 가져온 삶은 옥수수, 노란 고구마, 손수 깎아 온 과일을 나누어 드시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시는 게 시작이었다. 삶은 옥수수를 서로 권하는 손길에도, 스스럼없이 오가는 짧은 말들에도 오래된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소소한 먹거리를 나누며 정겨운 대화가 한참 이어지고 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 나지막하게 선창을 시작하신다. 그러면 곁에 있던 다른 할머니들이 자연스럽게 화음을 얹거나 추임새를 넣으며 노래가 완성된다. 옛 가요부터 흘러간 민요까지, 곡조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흥과 애틋함은 한결같았다.
음정이 조금 틀리면 어떠하리. 박자가 조금 어긋나면 또 어떠하리.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이들의 목소리에는 젊은 가수들의 미성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묵직하고도 따스한 울림이 있었다. 자식들을 다 키워내고, 삶의 파도를 몇 번이고 넘겨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함과 여유가 그 노랫소리에 짙게 녹아있었다.
이제 나는 황톳길을 걸을 때 굳이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세상의 화려한 음악 대신 정자에서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노랫소리가 나에게는 가장 완벽한 백색소음이자 최상급의 클래식 음악이기 때문이다.
촉촉한 황토가 발바닥을 다정하게 감싸 안을 때, 정자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땅에서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흙의 기운이 올라오고, 공기 중에는 한 인간의 일생이 축적된 삶의 온기가 감돈다. 발 밑은 투명하게 맑아지고, 귓가와 가슴은 다정하게 채워진다. 비움과 채움이 동시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순간이다.
정자 위의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저마다 걸어온 거친 황톳길이 있었을 것이다. 축축하고 질척여 걷기 힘들었던 날도, 발이 푹푹 빠져 지쳤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길의 끝에서 지금, 마음을 나눠 먹을 누군가와 함께 부를 노래가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을 이 정자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황톳길로 향한다. 신발을 벗고, 차가운 황토에 발을 묻는다. 잠시 후, 어김없이 정자 쪽에서 정겨운 노랫소리가 퐁퐁 샘물처럼 터져 나온다. 나는 그 노랫가락에 발걸음의 박자를 맞추며,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머릿속이 더없이 맑아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나의 비밀 아지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