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와도 꽃이다

by담서제미


며칠 전부터 꽂힌 글자가 있다. 무엇이든 한번 꽂히면 며칠 동안, 심지어 평생을 그걸 붙들고 산다. 글쓰기 해금, 수영이 그런 것처럼.


늦잠을 잤다. 알람도 없이, 눈이 저절로 떠질 때까지 잔 잠이었다. 눈을 뜨자 몸과 마음이 마치 밀린 정산을 마친 것처럼 개운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늦다'는 언제나 무언가를 놓쳤다는 뜻 아니었던가. 늦잠이라면 응당 하루의 앞머리를 잃어버린 셈인데, 그날의 늦잠은 오히려 나에게 무언가를 되찾아준 느낌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늦'이라는 한 글자에 마음이 걸린 것은. 늦잠, 늦더위, 늦가을, 늦바람, 늦철, 늦사랑, 늦배움, 늦둥이. 가만히 모아놓고 보니 '늦'이 붙은 말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늦더위는 성가시고, 늦바람은 위태롭고, 늦잠은 게으름의 낙인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늦가을은 왠지 쓸쓸하면서도 깊고, 늦둥이는 애틋하다 못해 귀하다. 같은 접두어를 달고도 이토록 다른 온도를 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늦'은 그 자체로는 아무 느낌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그 뒤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초라해지기도, 귀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몇 년 전 마음에 새겨두었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이소임 시인의 「늦꽃」이다.


등 굽은 할머니 / 등 더 굽은 할머니 / 팔짱을 끼고 / 저승길보다 멀 것 같은 / 횡단보도 / 함께 건넌다 // 오늘만큼은 꽃이 되고 싶었을까 / 횡단보도 한가운데 / 연리지처럼 엉켜 피어 있다 / 시허연 꽃으로 피어 흔들린다 / 지상에 뿌리를 내린 꽃만이 꽃이랴 / 형형색색 꽃 핀다고 그 꽃만 꽃이랴 /경적을 버린 / 정지선 밖 신호 대기 운전자들 / 횡단보도에 핀 늦꽃 / 기록하느라 오래 멈춰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시인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도, 다시 꺼내 읽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마음이 멎는다. 두 할머니의 굽은 등을 '꽃'이라 불러주는 그 마음. 그 꽃을 알아보고 경적을 버린 채 오래 멈춰 서 있는 운전자들. 늦게 피었다고 해서 꽃이 아닌 게 아니듯, 세상에는 젊음의 절정을 지나야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움이 있다.


생각해 보면 '늦다'는 언제나 무언가와의 비교에서 나온 말이다. 남들보다 늦게, 정해진 때보다 늦게. 그런데 그 '정해진 때'라는 것은 대체 누가 정한 것일까.


늦잠이 나에게 개운함을 준 것처럼, 늦배움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절실한 배움이 되고, 늦사랑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깊은 사랑이 된다. 늦은 것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지나왔기에,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아는 여유가 있다.


그러니 '늦'이라는 글자를 이제는 다르게 읽어보려 한다. 그것은 결핍의 표시가 아니라, 자기만의 속도로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다. 늦게 핀 꽃도, 늦게 든 잠도, 늦게 찾아온 마음도 모두 저마다의 시간표대로 정확히 도착한 것들이다.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피어난 늦꽃처럼, 나는 나의 속도로 오늘도 조금 늦게, 그러나 기어이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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