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앞에서 파란불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내 귀에 들어온 두 할머니의 대화.
"에고, 긍게 사람 노릇하고 살기가 어디 쉽간디."
갑자기 '노릇'이라는 단어가 화살이 꽂히듯 날아왔다. '노릇'이라는 두 글자. 사람 노릇, 어른 노릇, 자식 노릇, 부모 노릇.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노릇이라는 옷을 갈아입는다.
사전에는 노릇이 맡은 직분이나 역할이라 쓰여 있다. 하지만 정작 와닿은 노릇은 때로는 숨이 막히게도 한다. 노릇이라는 말 뒤에는 보이지 않는 기대와 잣대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어른 노릇은 속이 아무리 흔들려도 겉으로는 단단한 척, 다 겪어본 척 무게를 잡으라 한다. 그 모든 것의 뿌리에 있는 사람 노릇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이기심과 마음 씀씀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안간힘을 쓰는 일이다.
결국 노릇이란 세상이 우리 손에 쥐여준 대본과 같다. 우리는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대사를 잊어버리면 어쩌지, 동선이 어긋하면 어떻게 해' 매 순간 마음의 끈을 조인다.
"노릇이 대체 무엇일까"아무리 사전을 뒤져도 그것이 내가 원하는 물음에 답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방법을 몰라 헤매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괴롭다. 자식으로, 부모로, 온라인 게임인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슬롯가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수없이 들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내 어깨보다 너무 높고 내 보폭보다 너무 멀리 있다는 데 있다. 닿지 못하는 거리에서 오는 피로는 고스란히 마음의 멍으로 남는다. 두려움을 들킬까 봐 슬롯적인 가면을 뒤집어쓰기도 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요구에 직면할 때 우리는 "참 노릇하기 힘들다" 하며 긴 숨을 내쉰다.
그 한숨은 손을 들어 항복하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었다는 치열한 싸움이자, 잠깐만이라도 이 무거운 무대 의상을 벗고 날것의 나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세상은 참 쉽게도 "노릇을 하려면 제대로 해라"라고 다그친다. 제대로라는 이 말은 얼마나 잔혹한가. 한 번의 실수도, 한 줌의 서투름도 봐주지 않겠다는 칼날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완벽한 노릇이란 처음부터 없다. 우리 모두 살아가는 이 삶이 처음이고, 지금 맡은 그 역할도 난생처음 올라본 무대다.
이제 막 엄마가 된 이가 어찌 부모 노릇을 단번에 해내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매 순간 의젓한 어른일 수 있겠는가. 서툴고, 삐걱대고, 흔들리며 사는 것 그게 사람인 것을.
사람은 먼저 세상에 던져지고, 그 뒤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천천히 만들어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매달리는 노릇들은 나를 이루는 조각일 뿐, 나라는 존재를 통째로 규정하는 전부가 될 수 없다. 부모 노릇에, 자식노릇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고 해서 내가 깎이는 것은 아니다.
사람노릇 하기 힘들다며 대화를 나누던 두 할머니는 그래도 그 자식들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웃고 살제"라며 서로를 다독인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두 할머니가 다리를 끌며 길을 걷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오늘이라는 무대를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낸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며 나와 두 분을 다독인다.
우리는 노릇을 하려고 태어난 도구가 아니다. 그저 살고, 느끼고, 사랑하려고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노릇이라는 감옥은 나를 키우는 따뜻한 배경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