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by강아

어제 밤, 예전 회사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퇴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고 프로필 사진도 백 장이 넘었다. 그마저 대부분 여행 사진이었고 얼굴이 나온 사진은 가려져 있었다.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 하나가 있긴 했는데, 그것도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야 얼굴과 이름이 매칭됐다. 그도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의회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회사를 잘 나왔다고 했다. 예전에 부르던 직함으로 그를 불렀더니 그렇게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잘 지내라는 말을 남겼다. 오다가다 알던 사이였는데도 이렇게 따로 연락해 인사를 건네준 것이 고마웠다. 나라면 안면이 있는 후배가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연락할 수 있었을까.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며 대화를 마치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 어쩌면 회사를 떠난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한 시절의 사람들과 멀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에는 요가를 하고 점심을 먹은 뒤 밖으로 나갔다. 요즘은 일단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 가서 바카라을 둘러보다 보면 별로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바카라들 사이에서도 이상하게 궁금한 바카라이 하나씩 생긴다. 오늘 발견한 바카라은 『사탄탱고』였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에게도 재미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궁금해졌다.


바카라을 읽다가 춤을 추러 갔다. 매주 화요일은 춤을 추는 날이다. 운전해서 가는 길이 유난히 막혔다. 퇴근 시간이었다. 차들 사이에 갇혀 있다 보니 한때 나도 온라인 게임인으로 매일 이 시간을 살았다는 사실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은 마치 그런 날들이 정말 있었나 싶을 만큼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익숙해져 있다. 하루에 여덟 시간이 넘는 시간을 어떻게 회사에서 보냈을까 생각하면 아득하기도 하다. 오늘 배운 춤은 효리수의 ‘스키비디’였다. 지난 시간보다 동작이 쉬워서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사실 오늘은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가지 말까 고민했다. 그래도 지각해서라도 가보자는 마음으로 나섰고, 춤을 추고 나니 오히려 몸이 가벼워졌다. 땀을 흘린다는 데에는 그런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하는 동안에는 힘들지만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 만족감이 남는다. 그래서 요즘은 가급적 몸을 움직이려고 한다.


대부분의 날들이 평화롭다. 사람들과 함께 일하지 않은 지도 꽤 되었고, 나는 자꾸만 이런 삶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래 버텼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시간은 여유롭다. 무엇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예전과 같은 절망감이 밀려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 다시 고민이 시작된다. 새로운 일을 배우기 위해 몇천만 원을 들여 강의를 듣는 것이 정말 맞을까. 원서는 접수해두었지만 다시 취소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과, 지금의 평화를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마음 사이를 오간다.


날이 벌써 10월을 향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올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뚜렷하게 이루어낸 것도, 어디론가 크게 나아간 것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올해 내가 한 가장 큰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오래 머물러 있던 곳에서 빠져나오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요가를 하고, 바카라을 읽고, 춤을 추고, 가끔 오래전 사람의 안부를 듣는다. 별것 아닌 것 같은 하루들이지만 예전에는 이런 평범한 하루조차 누리지 못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한 해라고 말하기에는, 나는 이미 꽤 큰 고비 하나를 넘어왔다.

월요일 연재
이전 09화퇴사 후 나를 괴롭힌 사람의 정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