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019. 아이들이 학교 가기 싫어해요

학교가 아이들을 억압하는 방식

by듀르크하임



안녕하세요! 교육학하는 컨설턴트 듀르크하임입니다. 오늘 국제교류 실천공동체 한일합동교육연구회의 2026년 교류회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많은 분들이 방문해주셨고, 내일 폐회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밤 꼭 적어두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들이 아직 제 마음 어딘가에 날개짓을 하며 떠 있는 기분입니다.

오디세이학교와 공간민들레에 대한 학생들의 자세한 설명도 좋았고, 그 공간에서 어떤 수업을 듣고,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 배움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계속 생각난 것은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하면서 겪은 것을 솔직하게 말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어느 날의 새벽이었습니다.

바카라상 위에는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을 것입니다. 지우개 가루가 조금 흩어져 있고, 형광펜으로 그은 줄은 뒤로 갈수록 희미해졌을 것입니다. 아이는 졸음을 참으며 자신을 붙잡고 있었겠지요.

한 문제만 더.

이 페이지만 끝내고.

이 단원만 보고 자자.

그러다 아주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자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머리가 푹, 먼저 꺼졌을 뿐입니다.

하루가 길었고, 몸은 이미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떴을 때 아이에게 가장 먼저 밀려온 것은 쉼의 감각이 아니라 죄바카라감이었습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나는 왜 잤을까 하는 원망.

이 시간에 더 외웠어야 했는데, 더 풀었어야 했는데, 더 버텼어야 했는데 하는 마음.

아이는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동안 저에게도 그 새벽의 바카라상이 제 마음에 떡 하니 드러 앉아 버린 듯 합니다. 우리는 이런 아이를 보면 성실하다고 말합니다. 시험 기간에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아이, 목표를 위해 스스로를 관리하는 아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애쓰는 아이.


그 아이의 성실함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 안에는 성실함보다 더 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

밀리면 안 된다는 마음.

괜찮은 학생으로 보여야 한다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의 끝에는 이상하게도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시험 범위를 묻기 위해 교무실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선생님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문득 떠오른 질문, 오늘 있었던 일, 공부와 관계없는 별것 아닌 이야기까지 편하게 나누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을 과목 담당자로만 만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아이에게 성적표를 지나야 열리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좋은 학생이 되고, 좋은 학생이 되어야 선생님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순간 아이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성적은 점수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것을.

그 문장이 오래 남았습니다.


성적은 평가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세계 안에서 성적은 때로 어른들의 표정이 됩니다. 말 걸어도 되는 자격이 됩니다. 교무실 문을 열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 선생님 앞에서 조금 덜 작아져도 된다는 허락이 됩니다. 그러니 아이는 새벽까지 버팁니다.


문제 하나를 더 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좋은 학생으로 보이고 싶어서.

질문이 조용히 넘어가지 않는 학생이 되고 싶어서.

선생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아이가 되고 싶어서.

그 새벽의 바카라상에서 아이는 문제집만 붙잡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어느 학생이 표현한 달력에 대한 말들이었습니다.


3월에는 입학이 있습니다.

새 교실, 새 친구들, 새 시간표, 새 교과서가 옵니다. 아직 이름도 낯선 선생님들이 있고, 자리도 어색합니다.

그 어색함이 가시기도 전에 수행평가 안내가 시작됩니다.

제출 기한, 평가 기준, 모둠 구성, 발표 일정이 적힙니다. 그것을 챙기다 보면 4월 시험이 옵니다. 시험이 끝나면 다시 수행평가가 이어지고, 어느새 7월 시험을 준비합니다. 잠깐 방학이 오지만, 방학은 다음 학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름으로 다시 채워집니다.

그리고 다시 2학기.

다시 수행평가.

다시 시험.

다시 마감.

학교는 그렇게 움직입니다. 평가가 있고, 기록이 있고, 진도가 있고, 마감이 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익숙한 학사 일정입니다. 날짜가 적힌 한 칸 한 칸이 빼곡합니다. 그런데 그 달력 안에서 아이가 찾지 못한 칸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아이에게 진짜로 묻지 못하는 말,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지?" 그 질문을 적을 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도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행평가를 해야 했고, 시험을 준비해야 했고, 제출 기한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물을 시간은 계속 뒤로 밀렸습니다.


시험 끝나면 생각해보자.

수행평가 끝나면 쉬면서 생각해보자.

이번 주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하나가 끝나면 다음 것이 왔습니다.

아이의 마음보다 먼저 마감이 왔고, 아이의 질문보다 먼저 평가가 왔습니다.


학교는 진로를 말합니다. 아이에게 꿈을 적으라고 합니다. 장래희망을 묻고, 관심 분야를 묻고, 앞으로의 계획을 묻습니다. 그런데 꿈이 생기기 전의 막막한 시간, 자기 마음을 더듬는 시간,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시간은 자주 남겨두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열심히 살면서도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집니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점점 흐릿해집니다.


"진짜 원하는게 뭔지 말하면 다들 화를 내거나 이상하게 쳐다봐요"

우리는 분명 아이들의 미래를 틀어쥐고 현재를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경쟁에서 뒤쳐질까봐, 아이들이 풀어질까봐, 욕구와 욕망을 가지면 감정적이 되면 입시에서 패배할까봐 아이들의 마음을 너무 오래 무시해왔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교문에 대한 감상을 말했습니다.


등교 시간이 지나면 교문은 닫힙니다.

어른들에게 닫힌 교문은 안전입니다. 외부인을 막기 위한 장치이고,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에게 그 교문은 다른 모양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을 안에 가두는 문처럼 보였습니다.

그 마음을 쉽게 웃어넘기기 어렵습니다.

어른은 문 밖에서 교문을 봅니다.

학생은 문 안에서 교문을 봅니다.


바깥의 어른에게 교문은 보호의 선이지만, 안쪽의 학생에게 교문은 나갈 수 없음의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학생에게는 수업 시간에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던 기억도, 멀리 전학간 친구와 소통하던 중 핸드폰을 강탈하여 걷어가던 기억도 남아 있었습니다.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은 불편함보다 불신에 가까웠습니다.

초등학생 때보다 더 자랐는데도, 더 성숙해졌는데도, 학교는 먼저 걷어가고, 먼저 막고, 먼저 잠그는 쪽을 택한다는 느낌.


물론 학교에는 규칙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수업에는 집중이 필요합니다. 휴대폰이 수업을 방해할 수 있다는 걱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같은 규칙도 어떤 아이에게는 약속으로 남고, 어떤 아이에게는 불신으로 남습니다.

'함께 지키자'로 들릴 수도 있고, '너희는 믿을 수 없다'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많을까요? 우리 슬롯가 은연 중에 지키고 있던 규칙들이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말 고민해본 적 있을까요? 학교는 늘 교육을 한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규칙의 설명보다 규칙의 표정을 먼저 배웁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학교에 가야 잘 산다고.

세상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아이들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자기 삶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 청소년은 학교에서 정작 중요한 두 가지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정말 아이들이 요즘 세상을 '학교'에서 배운다고 믿는 분이 계신가요?

학교는 세상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고 반론하고 싶으신가요?

그럼 학교는 국어 수학 영어를 최상위권으로 잘하는 상위 10% 만을 위한 장소가 되어버린 걸 어떻게 말씀하실 것인가요?

나머지 90% 학생들, 인서울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패배자 취급하는 이 나라의 입시교육을 여러분은 약육강식의 세상이라고 가르치실 건가요? 경쟁이 교육의 본질인가요?


학교는 아이들에게 잘 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시간은 넉넉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을 읽는 일보다 시험을 견디는 일을 먼저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오늘 발표 중 자신을 애벌레에 비유했습니다.

애벌레에게 번데기의 과정 없이 날아보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오래 남은 비유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날 수 없습니다.

날개는 명령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애벌레에게는 번데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몸의 모양이 바뀌고 있는 시간입니다.


아이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조금씩 읽어보는 시간.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지 불안해하면서도 다시 걸어보는 시간.


그런데 우리는 자주 말합니다.

빨리 날아라.

입시가 온다.

진로를 정해라.

성적을 올려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잘 살아야 한다.

번데기의 시간을 지나지 못한 아이에게 이 말들은 조언보다 재촉으로 들립니다.

날개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아이에게, 어른들은 자꾸 하늘을 가리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싫어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꾸짖지 않아야 합니다.

그 말 뒤에는 대개 아이들의 마음에 칼처럼 박혀있는 어떤 장면이 있습니다.

학교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마음을 물어야 합니다.

학교는 아이에게서 무엇을 가져가고 있었을까요.

새벽의 잠

교무실 문 앞의 용기

달력의 빈칸

닫힌 문 앞의 신뢰

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

그리고 번데기의 시간


내일 폐회식과 필드워크가 남아 있습니다.

오디세이학교와 공간민들레가 아이들에게 어떤 시간을 만들어주었는지는 내일 조금 더 차분히 적어보려 합니다.


본 글은 교육학하는 컨설턴트 듀르크하임, 컨설턴트 박태찬의 교육상담 기록과 해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글의 저작권은 컨설턴트 박태찬에게 있으며, 무단 전재, 복제, 재배포, 2차 가공 및 상업적 활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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