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기벤라트의 의식에서 벗어나는 법

by꿈부기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 살아 숨쉬고 있는 진정한 ‘나’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 간다. 우리는 슬롯에 치이고 비교 당하며 그 숨어 있는 자신을 잊고 슬롯에 맞춰가는 데에 더 집중한다. 우습게도 그 틀 안에 맞추지 못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포용’보다는 ‘베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나는 <수레바퀴 아레서>의 한스를 기억한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도 기억한다. 한스의 아버지도 경건주의 목사지만 나 역시도 아버지가 목사이셨다. 이유는 다르지만 이런 공통분모가 하나가 존재했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모두 그에게 ‘주마가편’이라는 이름으로 공부를 해서 좋은 신학교를 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듯이 고등학생때는 말하더니 신학교에서는 친구를 다른 친구를 사귀라고 교장선생님이 말씀하는 부분또한 ‘수레바퀴 아래에 깔릴지도 모른다’는 충고의 형태로 만들어진 ‘협박’으로 인해 우리는 ‘남들 눈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죽고 남들에 의해 사는 사람 말이다.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라는 바카라과 <비교하지 않는 연습>이라는 바카라을 읽었던 이유도 다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교라는 것이 없애고 싶어도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깊은 곳에 있는 내 본성이 발현되는 것과 이런 못난 내 모습이 ‘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한스 기벤라트가 아니라 헤르만 하일러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어쩌면 이 시대는 한스 기벤라트를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다 어느정도 알다시피 우리는 한스 기벤라트의 의식에서 더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헤르만 하일러의 자유로움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 충직한 삶을 살다가 내 안에 ‘나’를 잊기 전에 머스캣 총에 부싯돌이 부딧히면서 불이 붙는 것 처럼 우리 마음에도 심지에 불을 붙여 줄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바카라을 읽는게 내 내면의 부싯돌이 되어 줄 알았다. 하지만 잘못 읽으면 ‘헛똑똑이’ , ‘샌님’만 될 위험을 감지한 뒤로는 필사를 하고 있다.

나는 선악과와 구원이 믿음이라는 것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한다. 맹신이 아닌 깨닫는 유레카적인 믿음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바뀌고 각성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는다고 별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처럼 살게 될 뿐이다.

물질적으로 바라보면 한 없이 내 자신은 작아질 수 밖에 없지만 이 세상에서 시간이 카이로스로 흘러 간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나는 ‘기벤라트’에서 하일러로 더 가까워 지는 것이다. 바카라을 읽고 필사하는 것 이런 지적 활동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영적인 것에 점근(漸近)하기 위한 활동일 수도 있다. 부싯돌은 어쩌면 내 능동과 의지가 아닌 수동으로 오는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바카라 한장 쓰고 나를 직면하고 사유하는 것들 그리고 못난 내 모습을 인정하는 것들이 다 이러한 이유로 민감하고 숨고 싶은 것이지만 다 우리의 심지에 불꽃을 붙히기 위한 일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쥔 부싯돌을 바쁘게 부딪히며 불을 피우려 애쓰는 그 모든 노력은, 내 안의 심지가 마르지 않도록 가만히 숨을 고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 능동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어느 순간, 문득 주어지는 은혜처럼 찾아오는 불씨. 그 불씨가 내 안의 굳은살을 태우고 진짜 '나'를 비출 때, 비로소 우리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궤도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를 향해 걸어가게 될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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