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수거함 일곱 개의 나라에서 온 사내
2026년 10월 24일(토) 9:30pm, 브레아 임프로브(Brea Improv) — 이스모(ISMO) 스탠드업 코미디, 밤 9시 30분 공연
브레아 다운타운(Downtown Brea)의 공영주차장은 무료다. 세로로 길게 불을 밝힌 “PARKING” 간판 아래 작은 글씨로 FREE가 붙어 있다. 미국에서 돈 안 드는 일을 만나면 괜히 의심부터 하게 되는데, 이날 밤 무대에 선 핀란드 코미디언이 바로 그 의심을 한 시간 넘게 웃음으로 바꿔 놓았다. 차를 세우고 브레아 대로를 따라 몇 분 걸으면 180번지 건물에 분홍빛 전광판이 보인다. ‘WHERE COMEDY BEGINS’. 아르데코풍 첨탑을 얹은 마키 옆으로 올드 브레아 촙 하우스의 노란 네온이 세로로 흐르고, 길 건너편에서는 UFC 짐의 빨간 간판이 맞불을 놓는다. 마키 화면에는 이미 다음 손님 조지 페레즈의 11월 6일 공연이 걸려 있었다. 코미디 클럽의 시간은 오늘 밤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웃음을 예고하며 흘러간다.
브레아 다운타운에 자리하고 있는 임프로브 코미디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면 검은 벽 사이로 빨간 띠가 사선으로 깔린 좁은 복도가 이어진다. 일반 극장의 입구라기보다 무대 뒤로 끌려 들어가는 통로 같은 긴장감이 있다. 1991년부터 이 자리를 지켜 온 클럽답게 조 코이, 마거릿 조, 가브리엘 이글레시아스같은 이름들이 이 복도를 지나갔을 것이다. 쇼룸은 일반석이라 선착순으로 자리를 잡는다. 15분 전 입장을 했지만 전체 좌석의 반 이상 비어있다. 테이블마다 QR 카드가 놓여 있어 휴대폰으로 주문하고 결제한다. 모든 손님에게 음식이든 음료든 두 품목 이상 주문해야 하는 규칙이 있는데, 손 한 번 들지 않고 그 의무를 치를 수 있게 해 둔 셈이다. 내 자리는 428번 테이블이었다.
공연 전 진행자가 규칙을 읊는다. 소리치지 말 것, 테이블 대화는 작게, 휴대폰은 넣고, 촬영은 절대 금지. 그리고 오프닝으로 대노 카터가 올랐다. 맨해튼 비치에서 왔다는 그는 판초스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코미디 나이트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로펌 파트너가 된 변호사 아내 덕분에 "하루 만에 텍스 브라켓이 여섯 단계 올랐다"는 그는 주급 50달러 용돈으로 사는 남편의 비애를 늘어놓았고, 레드 랍스터에서 먹은 새우 파스타가 임신 소동으로 번진 사연을 옐프 리뷰 형식으로 낭독했다. 식당 측이 사과의 뜻으로 보낸 기프트카드가 5달러였다는 대목, 즉 "구토 한 번당 1달러"에서 객석이 크게 터졌다. 오프닝의 임무는 객석을 데우는 것인데, 그는 그 일을 충분히 해냈다.
브레아 임프로브 웹사이트에 나와있는 이스모의 공연 안내.
"핀란드가 낳은 최고"라는 소개와 함께 이스모 레이콜라(Ismo Leikola)가 등장했다. 1979년 핀란드 위배스퀼래에서 태어나 2002년 데뷔했고, 2014년 할리우드 래프 팩토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웃긴 사람' 타이틀을 따낸 뒤 이듬해 말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왔다. 2018년 핀란드 코미디언 최초로 코넌 토크쇼에 출연했고, 그 클립은 1억 회를 훌쩍 넘게 재생되며 심야 토크쇼 역사상 손꼽히는 스탠드업 영상이 됐다. 그날 그의 출연이 핀란드의 1면 뉴스였다고 하니, 한 나라가 통째로 웃음을 수출한 날이었던 셈이다. 내가 기억하는 이스모는 어설픈 영어 발음으로 영어 단어 자체를 뜯어보던 코미디언이었다. “ass”라는 단어 하나로 몇 분을 끌고 가던 그 언어 유머 말이다.
그런데 이날의 이스모는 달랐다. 여름 넉 달을 핀란드와 유럽에서 보내고 막 돌아왔다는 그는 첫마디부터 문화 비교로 들어갔다. 요즘 미국이 갈라졌다고들 하지만 딱 하나에서는 완벽하게 단결해 있더라, 재활용을 신경 쓰지 않는 것. 미국은 파란 통 하나인데 핀란드는 분리수거함이 일곱 개다. 유리, 금속, 플라스틱, 종이, 골판지가 다 따로이고, 이웃이 제대로 버리는지 감시한다. 미국 사람들이 "내 쓰레기, 내 선택(my trash, my choice)"을 외칠 때, 핀란드 사람은 이웃집 커튼 너머를 엿본다. 피자 상자에 피자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객석은 웃었지만, 웃음 끝에 묘한 뜨끔함이 남는 비교였다.
공연이 시작되기전 코미디 하우스의 모습.
노동 문화로 넘어가자 비교는 더 날카로워졌다. 핀란드 매니저가 미국 매니저에게 “7월 내내 휴가”라고 통보하자 미국 쪽이 “7월 며칠?”이라고 되물었다는 일화, 미국에선 해고되면 상자 하나 받고 바로 나가지만 핀란드에선 반년을 더 다닌다는 이야기. 압권은 미국 병원이었다. 미국 생활 10년 동안 이곳에서 의사를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의사에게 전화해서 "신규 환자 받으세요?"라고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동응답이 "응급 상황이면 전화를 끊고 911로 거세요"라고 하길래 그대로 했더니 911은 바로 받더란다. 그래서 물었다. "신규 환자 받으세요?" 미국에서 건강보험 전문가라고 활동하고 있는 나로서도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다.
이날 공연의 또 다른 축은 노래였다. 무대 한쪽에 둔 작은 기타를 들고 그는 평생 기타를 쳐 왔는데 이제야 그걸 코미디와 합칠 수 있게 됐다며 노래를 시작했다. 〈몸 부위가 모자라(I’m Running Out of Body Parts)〉는 “work my ass off”, “cost an arm and a leg”, “cat got my tongue” 같은 영어 관용구로 여전히 언어유희를 보여줬다. 마지막 곡은 미국 이주자를 위한 '교육용' 노래였다. 가격표에 세금이 빠져 있고, 공짜 휴대폰에도 세금이 붙고, 렌터카는 수수료 위에 수수료가 쌓인다. 결론은 이랬다. 여기는 자유의 땅(land of the free)이 아니라 수수료의 땅(land of the fee)이다. 무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온 나로서는 묘한 승리감마저 들었다.
공영 주차장 파킹 글자가 브레아 대로에서 아주 잘 보인다.
이스모의 코미디 무게중심이 언어유머에서 이제는 문화 비교로 옮겨 가지만 펀치라인은 여전히 단어에서 나왔다. 관용구로 만든 노래가 그랬고, “free”와 “fee”의 한 글자 차이가 그랬다. 초기의 이스모가 "영어가 이상하다"고 말했다면, 미국 생활 10년 차의 이스모는 "미국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영어는 익숙해졌는데 병원 예약과 렌터카 수수료는 끝내 익숙해지지 않는 것, 그것은 이민자 대부분이 밟는 순서이기도 하다. 외국어로 사는 사람의 웃음은 결국 그 낯섦을 견디는 방식이다.
다만 이날의 웃음이 온전하지는 않았다. 내 왼쪽 테이블에 여섯 명의 젊은 일행이 앉았는데, 공연 내내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떠들었다. 직원에게 주의를 부탁했고 직원이 실제로 주의를 줬는데도 그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코미디는 타이밍의 예술이다. 펀치라인 하나를 놓치면 그다음 웃음까지 줄줄이 날아간다. 진행자가 공연 전에 분명히 "테이블 대화는 작게"라고 당부했던 터라 더 씁쓸했다. 코미디 클럽이 술잔을 기울이며 편하게 즐기는 곳이라 해도, 무대 위의 공연자와 옆자리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어느 공연장에서나 같은 규칙이건만. 공연 예절을 지키지 못하는 몰상식한 인간들이 어디에든 존재하기는 한다.
그래도 이스모는 남았다. 핀란드에서는 살인범조차 분리수거를 한다는 블랙 유머도, 출구 쪽 복도에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던 넉살도, 한 달쯤 뒤 유튜브에 새 1시간짜리 스페셜을 공개한다는 예고도 남았다. 공연이 끝나고 다시 브레아 대로로 나오니 마키에는 여전히 다음 손님의 얼굴이 떠 있었다.
분리수거함 일곱 개의 나라에서 온 그는 이 수수료의 땅에서 10년을 버티며, 낯섦을 웃음으로 분리수거하는 법을 익혔다. 무료 주차장으로 걸어 돌아가는 길, 그 웃음 하나만큼은 수수료 없이 챙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