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온 트랙

by플랑시

내 나이 사십, 사실 빠른 년생이라 39세다, 친구들은 불혹이 되면서는 몸이 아프니 어디가 불편하니 하지만 고령화 속도를 볼 때 당분간 중위연령을 따라잡지 못한다. 마흔살은 어떤 위치일까, 재정적으로는 인생의 흑자구간이면서 회사에서 허리라인, 빠른 동기들은 이제 팀장 직함을 달고 관리자가 되었다. 아이는 아직 미취학 아동, 내가 그나마 빠른 편이다. 이제 아기를 낳은 친구, 딩크인 친구, 이번에 결혼하는 친구, 안 하는 친구들 소수 등 다양한데 기껏해야 주변인인 준거집단에선 제일 빠른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26살에 입사, 회사는 15년 차다. 결혼은 서른에, 서른둘에 서울에 작은 아파트를 샀다. 아이는 서른셋에 낳았다. 매일 징징댔지만 주변에선 “너 정도면”이란 말을 많이 썼고, 나로서도 ‘이 정도면 낫배드지’라는 안도감과 ‘이걸로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불안사이에서 지내왔다.




아이는 양가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꾸역꾸역 길렀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럭무럭 잘 자랐다. 천식이 심해서 입원하기도 했지만, 매 해 자랄수록 병치레가 잦아들었다. 아무거나 잘 먹고, 알아서 싸고, 때 되면 자니 더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등원은 아내가 담당하고, 하원은 장인어른이 해주신다. 나는 그냥 회사만 안잘리고 잘 다니면 된다.라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초등학교 입학이었다. 역설적으로 아이가 한 살 더 성장해서 본격적인 공교육 트랙을 타기 시작하면 양육의 공백이 생겼다. 더 늦은 등교, 더 빠른 하교에 양육을 위한 맨파워가 필요했다. 칠순을 앞둔 장인어른은 정년 이후 촉탁직으로 기존 회사에 파트타이머로 근무 중이었으므로 바뀐 타임테이블을 맞추기는 빠듯했다.




입사할 땐 직급이 5단계였다.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그리고 희박한 확률의 임원과 임원은 아닌데 임원급 직바카라을 시키는 애매한 임원대우 같은 자리까지, 그쪽은 입사 때부터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수평적 소통을 명분으로 2015년부터인가 직바카라이 간소화됐다. 사원-선임-바카라임 3단계로 과차부장 직급의 통합이었다. 연공제 베이스의 임금체계에서 늙어가는 조직에 대응하는 수로 보였다. 동기중 엑셀에 빠삭한 이는 차트로 계단식 연봉상승이 포물선형 상승으로 바뀌면서 총소득이 줄어듬을 논증하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당시 내 반응은 “오히려 좋아”였다. 바카라임달고나면 잘릴 때까지 더 올라가는 경쟁에 치이지 않고 늘러붙을 수 있잖아? (물론 회사는 솥밥 누룽지마냥 눌어붙는 놈들에게 끓는 물을 부어 불려버린다) 바카라임 5년 차, 예전 같으면 차장 진급여부를 따지고 있을 때였다. 아이가 입학하는 2027년이 내 마음속 육아휴직의 D-DAY가 되었다. ‘그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내가 처음으로 양육자 역할도 제대로 하고 우리 가장님 내조도 할 수 있는 기회란 생각이었다.




여느 온라인 게임인들이 그렇듯 회사는 대단한 자아실현보다는 생계였지만, 가랑비 젖어들듯 자신이 만든 안온함을 즐기고 있었다. 매일같이 집에가고 싶다며 의미 없는 말을 남기는 친구들의 단톡방에선 “아이씨 회사 그만둔다.”라는 말도, 이번 주 로또 1등이 된다는 둥 빈말이 시나브로 루틴으로 올라오곤 했지만 연차가 올라가면서는 다들 업무시간에 바빠서인지 대꾸가 없거나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누군가는 온라인 게임에서의 성공을 속으로 꿈꾸고 있었겠지만, 주변의 흔한 월급쟁이들은 그저 주식이든 코인이든 뭐 하나 터지길 바라면서 소액을 투자하는 새가슴이었고, 똘똘한 한채 라 불릴만한 부동산 하나를 손에 넣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다 이룬거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평화롭게 불행했고, 품속의 마지막 조커카드처럼 육아휴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작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다는 사표는 내겐 없었다.




문송하다 못해 이젠 사라진다는 문과를 나와서 뭐 파는 곳인지도 잘 모르는 회사에 들어왔다. 2012년 취업시즌 내 성적은 55전 2승 53패. 8학기였고 일단 어지간하면 들어봄직한 회사에는 원서를 냈다. 내가 봐도 애매한 사이즈였다. 명문대라 하기엔 부족한 학벌, 노력의 지표라면 부족한 학점, 급조로 만들어낸 다들 인플레를 탄 영어 성적, 인턴십 경험 무 알바경험 다수(지만 자소서에 써서 뭐 하나 싶었다). 문과면서 회계/재무 쪽 자격증이나 백그라운드가 없으니 주구장창 영업/지원 부서에 원서를 냈다. “먹고살려고”라는 다섯글자를 500자나 1,000자로 늘어 쓰는 일을 쉰 번 정도 하고, 손에 꼽을 정도로 인적성 시험을 보고, 그중 일부를 면접을 보고 2개 회사를 붙었다. 고민하다 하나를 골랐다. 이유는 안정성 때문이었다. B2B 베이스 회사고, 재무적으로도 사업구조적으로도 안정적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회사가 돈을 잘 벌던 시기에 입사해서인지, 사원 때는 회사사람들이 술값으로 연봉의 10%는 받는 것 같았다. 주 3회에 가까운 각종 회식. 잘 먹지도 못하는 술독에 빠져서 헤롱거리고 비척거리고 “내가 진짜 그만둔다.”라고 공허한 다짐만 하다 보니 서른즈음이 되었다.




높으신 분의 경영메시지처럼 주기적으로 나오는 10년간의 위기론에 담을 쌓고 살다 보니 어느덧 난파선처럼 회사가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신입채용이 끊어진 지는 3년이 넘었다. 초고령화와 저출산이라는 한국슬롯를 압축시킨 인구구조였다. 사원이 임원보다 귀했다. 누가 봐도 그냥 “부장”인 분들이 팀마다 하나둘은 있고, 많은 부서는 절반정도를 차지했다. 그런 팀은 노인정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똘똘하단 소리 좀 듣던 대리급들은 그 유명세만큼 쏟아지는 업무량과 직무와 직급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전화통에 지쳐가다 하나 둘 요즘 뜨는 업계로 이직했다.



그렇게 몇 명의 후배와의 송별회를 할 때마다 느낀 위기감에 잠깐 링크드인과 리멤버를 기웃거리긴 했지만 며칠 뒤면 이내 이직열정은 짜게 식고 늦게 도착한 간짜장마냥 퍼져 버렸다. 이 업계와 회사가 서서히 가라앉더라도 이 회사가 한 번에 죽진 않겠지라고 믿고자 했다. 임원과 중간관리자들은 본인들도 처음 겪는 상황임에도 마치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스런 뉘앙스를 풍기며 이바닥은 기본적으로 사이클이고 치킨게임이다라는 논리를 펼쳤다. 다른 놈이 엎어지면 살아남은 놈이 독식하는 구조이므로 우리 회사는 살아남고 그 과실을 배불리 먹을 거라는 말이었다.



오히려 불안 속에서도 삶의 질은 더 나아졌다. 낮아진 가동률이 만든 물리적인 업무강도 하락과 예산이 짤려서 줄어든 술자리 때문에 한결 나아진 일관적인 저녁에 정착했다. 아이는 이제 아기 티는 찾을 수 없는 팔팔한 어린이가 되었다. 제법 젓가락질도 하고, 스스로 이도 닦고, 기저귀는 커녕 알아서 화장실 가서 똥도 누고 오니까 5점짜리 아빠 입장에선 손갈 일이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퇴근시간은 안정적이고, 처가의 도움도 받고 있다. 아내는 늘 지쳐 보이지만 꼬박꼬박 제시간에 집에 온다. 내 시간이 생겼다. 이쯤 되면 성공까진 아니더라도 만족할 순 있는 삶이었다. 30대 버킷리스트로 마라톤을 했으니 40대엔 철인 3종을 해봐야지라는 마음으로 새벽에 수영 강습을 듣고 출근하는 루틴. 흔한 회사원 동년배 대비 갓생을 산다고 자위하고 있었다. 미래는 위기가 지뢰밭이지만 당장은 생활이 정상궤도에 올랐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BGM으로 깔려있었지만, 사실은 실체 없이 허우적댔다.



4분기가 넘어가고 있는 화요일 아침이었다. Fin Day(오리발을 끼고 하는 수영수업)을 마치고 대기업 복지라는 통근버스에서 침 흘리며 자고, 아침 구내식당 밥을 경제 유투브를 보면서 10분 만에 먹고, 사무실에서 또 다른 복지인 에스프레소 샷을 내려 저 멀리 물결을 내려다볼 때까지만 해도 이 루틴이 장기지속할 거라 생각했다.